대선주자들의 이중적 태도, 노동시간 단축 과제 해결 늦춘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인구소멸 국가와 장시간 노동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8명이라는 이야기에 머리를 감싸며 외친 이 한 마디로 국내에서도 유명해진 조앤 윌리암스 미국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는 교육방송(EBS) <위대한 수업 4>에도 출현해 한층 더 차분하게 한국의 저출생에 대해 분석한 바 있다.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이 저출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이었다. 물질적 가치 지향이 강하고 장시간 일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는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겠다는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 가족 시스템과 노동시스템이 엇나가 있는 것이 저출생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진단이다.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1872시간으로 OECD 평균에 비해 130시간 길다. OECD 국가 중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그리스, 이스라엘, 멕시코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긴 노동시간이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오랫동안 연간 2000시간을 넘어 OECD 1~2위를 다투어 온 것을 감안하면 제법 짧아진 것이다.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이 2000시간 미만이 된 것은 주 52시간 근무(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초과근로를 12시간으로 제한한 것)가 시작된 2018년부터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고자 한 정부의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장시간 노동하는 국가라는 것은 분명하다.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동시간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된 요구가 나온다. 반도체, 건설 등 특정 산업에서 52시간 상한을 유연화하여 주당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요구가 한 가지다. 반대로 현재보다 노동시간을 좀 더 단축해야 한다는 요구는 주 4.5일 혹은 4일제라는 구호로 표출되고 있다. 각각 노동시간에 대한 '산업적 요구'와 '삶의 질 요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기묘하게 접합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대표는 반도체 산업의 52시간 상한의 유연화를 이야기했다가 철회하고, 지금은 주당 4.5일, 나아가 주 4일제를 공약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아예 52시간 상한 폐지와 주 4.5일제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잘 이해되지 않는 방향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접합을 선의로 해석하면 한 편으로 '산업적 요구'를 수용하여 노동시간을 유연화하는 가운데 그 배치를 조정하고 장기적인 감축을 추구하여 '삶의 질 개선'도 이루겠다는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노동시간에 대한 정치권의 이중적 태도는 실제로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과제를 지연하는 결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조앤 윌리암스의 진단처럼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지향이 강하고 오랫동안 유지된 장시간 노동 문화가 고착된 우리나라에서 '산업적 요구'와 '삶의 질 요구'의 수평적 배치는 산업적 요구로 기우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앤 윌리암스는 <위대한 수업 4> 강연에서 주 52시간 상한 유연화 시도를 콕 짚어서 저출생 문제를 심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시간과 출생률에 관한 조앤 윌리엄스의 지적을 단순히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 학자의 원론적 견해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출생에 관한 연구 중 많은 수가 자녀 출생 연령대 성인들의 장시간 노동이나 불규칙하고 비표준적인 노동시간 배치가 출생률을 낮춘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여성의 출산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 요인이 자녀출생 시 발생하는 경력 희생이나 돌봄 부담 등 자녀 패널티(child penalty)의 가족 내 분배에 있다는 최근의 저출생 연구 경향도 노동시간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노동시장 참여자들의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인 조건에서 자녀를 출생하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경력 패널티는 더 클 것이며, 파트너와 돌봄 부담을 분배하는 것도 원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구 소멸 국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현 시기 노동시간에 대한 명확한 방향은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성인들이 삶의 다른 요구와 노동시장 참여를 결합하기 용이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저런 예외적인 상황을 고려한 산업적 요구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우선순위에서는 부차적으로 취급해야 한다. 이는 한 편으로 52시간이라는 상한이 국제적 기준에서 이미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른 한 편으로 장시간 노동을 선호하는 한국의 기존 제도적·문화적 환경이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예외'를 '왜곡된 표준'으로 만들 수 있는 경로의존적 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도 노동시간 상한에 대한 예외부터 요구하기보다 주어진 노동시간 안에서 더 생산성 있게 일할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을 갖추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방향이다.

노동시간과 출생률에 관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주 4.5일제 혹은 4일제 논의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 위에 있음은 틀림없다. 다만 분배적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조치가 상대적으로 노동시장 지위가 높고 안정된 고용 계층에게 유리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법·제도적 진전이 중소영세기업 종사자,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 등 노동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자리한 노동자들에게까지 미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주 4.5일제 혹은 4일제 논의와 함께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근로시간 규제를 포함한 근로기준법의 적용,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 등 노무 제공자의 노동시간에 대한 규율 방안 등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노동시간의 총량적 축소와 함께 노동시장 참여자들의 '시간주권'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 역시 중요하다. 개인의 생애 과정을 고려할 때 성인들은 어떤 시기에는 노동시장 참여에 전념하기를 원하지만, 다른 시기에는 출산과 육아, 돌봄, 학습, 휴식 등 다양한 다른 역할들도 수행할 것을 요구받거나 희망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삶의 질과 자기발전, 그리고 저출생 문제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성인들이 자신의 처지와 희망에 따라 노동시장 참여시간을 조정하고 다른 역할을 결합할 수 있는 선택지가 확대되어야 한다. 매번 다른 역할을 요구받을 때마다 노동시장에서 퇴장해야 한다면 그만큼 개인들의 선택지는 좁아질 것이다. 부모휴가, 가족돌봄휴가, 출산·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등이 이를 위한 제도이지만 제도의 취지에 비해 활용도는 낮다. 노동시장 참여자들이 실제로 자신의 시간을 좀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실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이 강화되어야 한다.

출산이라는 의사결정은 매우 종합적이다. 개인은 현재 내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 2세를 가져도 좋을만큼 충분히 긍정적인가에 대한 총체적 판단에 근거해 출산 여부를 결정한다. 따라서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다양하며, 어느 한 두 가지 요인만으로 출생률이 급증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노동시간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개인들의 시간주권을 보장하더라도 그것이 출생율 반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시간 문제의 해결이 없이 출생률이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장시간 노동 체제의 해체는 저출생 문제 해결의 충분조건이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모든 성인이 일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기도 인구소멸의 위협을 피해가기도 어렵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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