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이하 현지시간) 상호관세 발효를 90일간 전격 유예했다. 중국을 단독 겨냥해 125% 관세를 매겼고 나머지 국가들엔 10% 보편관세만 부과하기로 했다. 지난주 상호 관세 발표 뒤 폭락했던 시장은 급등했다. 이번 조처로 무역 전쟁이 미·중 간으로 초점을 좁히게 됐지만 양국 협상 전망은 요원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상호관세가 발효된지 약 13시간 만에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미국이 중국에 부과하는 관세를 125%로 올린다"고 밝히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선 "90일간의 유예를 승인해 이 기간 동안 대폭 인하한 10% 상호관세가 적용된다"고 밝혔다. 이 조치는 "즉시 발효"되며 이에 따라 25% 관세가 부과됐던 한국에도 90일간 10% 관세가 적용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게시글에서 상호관세 발표 뒤 보복 등 각국 반응을 평가해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그는 관세 유예를 받은 국가들은 미국에 "무역, 무역 장벽, 환율 조작, 비금전적 관세" 관련 "협상"을 요청하고 "내 강한 권고에 따라 어떤 방식, 형태, 형식으로도 미국에 보복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들과 달리 "중국은 세계 시장에 대한 존중 부족을 보였다"며 중국에 대한 관세를 오히려 올렸다. 104% 관세 폭탄을 맞았던 중국은 이날 앞서 10일부터 대미 보복 관세 84%를 적용하겠다고 맞대응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유예 배경으로 시장 혼란을 고려했음을 시사했다. <뉴욕타임스>(NYT),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에 대한 채권시장 반응에 주목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주말에 투자자들이 "불안해 하는" 것을 인지했다고 답했다.
그는 "채권시장은 매우 까다롭다. 난 그걸 보고 있었다"며 "지금 채권시장은 아름답지만, 간밤에 사람들이 약간 불안해 했다"고 설명했다. 또 "지난 며칠간" 관세 유예에 대해 생각해 왔다고 했다.
이번 주 초 4%였던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가 9일 4.5%로 급격히 뛰는 등 채권 시장은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채권 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인다.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서둘러 팔아 치웠다는 것이다. 국채 금리 상승은 정부가 자금을 조달할 때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트럼프 정부에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승부터 기업의 차입 비용 증가까지 경제 각 부문의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통상 시장이 불안정할 땐 안전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번 주 주가 하락에도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미국채 매도가 심화됐다. 이에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 채권 시장 신뢰 상실 및 미국채 안전자산 지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 재무장관을 지낸 로렌스 서머스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 시장이 "문제 있는 신흥시장처럼 취급 받고 있다"며 현 상황은 "세계 금융 시장 내 미국 자산에 대한 전반적 혐오감"을 반영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관세 유예가 "원래 대통령의 전략"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외신들은 시장 혼란과 점점 증가하는 공화당 내부 및 공화당 주요 기부자를 포함한 금융가들의 반발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했다. 관세 관련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에 "멍청이"라고 막말을 던지는 등 측근 간 대립도 극에 달해 있었다.
이날 하원 청문회에 출석한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트럼프 관세 정책을 열띠게 옹호하던 중 유예 소식을 접했다. <AP> 통신 등을 보면 그리어는 청문회에서 최소 2시간가량 관세를 옹호한 뒤 관세 일시 중단 발표를 알고 있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는 "몇 분 전 그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스티븐 호스포드 민주당 하원의원은 그리어를 향해 "방금 당신 상사가 당신 뒤통수를 쳤다"고 꼬집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도널드 트럼프는 일주일간 시장과 치킨게임을 벌여왔지만, 9일 그가 지난 2일 세계를 상대로 벌이기 시작한 다중 전선 무역 전쟁이 경제적, 재정적, 정치적으로 지속 불가능해졌다"며 이는 트럼프 대통령에 "심각한 좌절"이라고 봤다.
신문은 자산운용사 SLC의 덱 멀라키 이사가 관세 유예로 트럼프 대통령이 "시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게 입증됐다"며 "시장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고 위협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 안전 장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증시·유가 급반등…"트럼프, 언제 마음 바꿀지 아무도 몰라" 불확실성 여전
지난 2일 상호관세 발표 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가장 큰 혼란을 겪은 미국 증시는 9일 폭등했다. 스탠더드앤푸어스(S&P)500지수는 전날보다 9.52% 오른 5456.9,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7.87% 오른 40608.45,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12.16% 오른 17124.97에 거래를 마쳤다. 2일 이후 전날까지 S&P500은 12%, 나스닥은 13% 폭락한 뒤다.
상호관세 발표 뒤 경기 침체 전망으로 급락한 국제유가도 9일 급등했다. 이날 서부텍사스유(WTI) 선물은 4.65% 오른 배럴당 62.35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지난 2일 배럴당 71.71달러로 거래됐던 WTI 선물은 8일까지 17% 폭락하며 60달러 밑으로 떨어진 바 있다. 이날 브렌트유 선물도 4.23% 오른 배럴당 65.4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보면 9일 관세 유예 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향후 12달 내에 65% 확률로 경기 침체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곧바로 철회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여전히 침체 확률을 45%로 보지만, 침체를 기본 가정으로 삼지 않는 이전 전망으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10일 아시아 증시도 급반등했다.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6.6% 상승한 2445.06에, 코스닥지수도 5.97% 오른 681.79에 거래를 마쳤다. 일본 니케이지수는 전날보다 9.13%, 대만 가권지수는 9.25% 급등했다. 고율 관세 부과에도 부양책 기대에 힘입어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1.16%, 홍콩 항셍지수는 2.06% 올랐다.
전문가들은 혼란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AP>에 따르면 미국 무역 관료를 지낸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윌리엄 레인쉬 선임고문은 관세 유예는 좋은 소식이지만 "그(트럼프 대통령)가 금요일이나 다음 주에 마음을 바꾸지 않을지 어떻게 아나?"라며 이번 조치 또한 트럼프 정부의 "정책 불확실성과 신뢰성 없음"을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AP>는 관세 유예에도 "실질적 피해는 이미 발생했다"며 "미국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트럼프팀의 균열이 드러났으며 해외에서 물품을 공급 받고 해외 판매에 의존하는 기업들이 낭패를 봤다. 주식시장을 통해 은퇴 자금과 학자금을 마련하는 미국인들은 불안한 날들에 고통 받았다"고 지적했다.
미·중 무역대결은 심화…중 '견딜 준비' 했지만 고립 위험도
이번 유예로 당분간 미국 대 전세계의 무역 전쟁이 미·중 대결로 초점을 옮기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 취재진에 시진핑 국가주석이 "매우 똑똑한 사람"이고 시 주석과 만나거나 통화할 의향이 "물론 있다"고 밝혀 협상 여지를 열어뒀다. 그는 "중국은 협상을 원한다"며 "단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대화가 성립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봤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싱크탱크 중국세계화센터(CCG)의 빅터 가오 부소장이 "중국 관점에서 볼 때 협상이나 대화를 원한다면 최후통첩이 아닌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단기적 협상 가능성을 낮게 봤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트럼프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은 이미 시작됐고 양쪽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CNN 방송은 트럼프 1기 때 무역 전쟁을 치른 뒤 중국이 유럽부터 동남아시아까지 무역 협력을 넓히며 고통을 감수할 능력 또한 키워 왔다고 지적했다. 중국 지도부가 민심과 여론에 즉각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짚었다.
방송은 미 캘리포니아 샌디에고대 21세기중국센터의 빅터 시 소장이 관세로 인해 중국이 "수백만 실업자"와 "파산의 물결"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중국이 미국 정치인들보다 이를 훨씬 더 견딜 수 있다"고 전망했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이 "코로나19 기간 동안 경제 폐쇄로 막대한 실업이 초래돼 고통을 겪었지만 (지도부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다만 미국의 중국 집중 겨냥은 시 주석이 9일 주변국과 "운명 공동체 구축"을 촉구하는 등 미국이 공격 중인 다른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엔 방해가 될 수 있다. 중국에게 유리했던, 미국을 배제한 중국과 전세계 무역 협력에서 중국 고립으로 그림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국가안보 관료를 지낸 에반 메데이로스 미 조지타운대 교수가 "이는 중국에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다른 모든 나라들은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고 무역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은 고립돼 더 큰 압력에 직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관세로 미국 시장이 사실상 막힘에 따라 중국 제품이 유럽 및 아시아 국가로 더 많이 흘러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 국가들은 이미 시장에 중국 상품이 넘쳐 일자리에 타격이 오는 것을 우려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관세 유예로 중국 외 다른 국가들은 무역 협상을 할 시간을 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75개국 이상"이 협상을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 등을 보면 협상을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은 9일 관세 유예로 협상을 위한 "여지가 확보"됐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 본부장은 다만 대중 수출과 풍선효과를 고려할 때 "여전히 피해 최소화를 위한 신속한 대미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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