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시간끌기, 시민의회 있었다면 달랐다

[복지국가SOCIETY] 내란의 끝과 시민의회의 시작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필 무렵이면 우리 사회가 정상화의 궤도로 진입할 줄 알았다. 12·3 한밤중의 갑작스런 내란은 시민들의 힘으로 저지되고, 시민들의 목소리로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으로 이어져 3월초중순 쯤이면 탄핵이 완성되고, 다시 한국사회가 도약하는 단계로 접어들 줄 알았다.

끝나지 않은 대한민국의 혼돈

4월이 바로 코앞이지만 우리 사회 혼돈의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분열과 갈등은 더 격화해 사실상 내전상태로 돌입했다. 한쪽은 윤석열의 복귀를 도모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복귀를 막는데 사생결단의 자세로 임하고 있다. 한밤중에 군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총을 들고 난입한 그날 밤은 상식있는 누가 보아도 헌법을 유린한 사태로 보이지만, 최종 심판자의 역할을 해야 할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미루고 있어 혼란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시선이 서구 근대를 연 출발점이기는 했지만, 1·2차 대전에서 1억에 가까운 인간들이 잔혹하게 학살하고 학살당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성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사실 인간 개개인들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다. 오히려 존재유무가 불확실한 이성보다는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몸이 우선하기에 생물적이고 관계적이다. 조금 있는 이성도 불안과 공포에 휩쓸리면 쉽게 광기로 변한다. 물론 이성과 도덕성이 관계성과 생물성보다 우월한 인간들도 있지만, 바다속의 소금만큼이나 희소해 보인다.

헌법재판관들이 이성적이라면 많은 시민들이 직접 목도하고, 그후에 밝혀진 증거를 바탕으로 탄핵결정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많은 헌법전문가들이 전원일치로 탄핵결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고 유력한 대선후보들은 다음 행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한달 넘게 최종 결정을 미룸으로써 한국 사회는 혼돈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고, 윤석열이 복귀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이미 우리 사회로 들어왔다. 작가가 작품으로 이야기하듯,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정신으로 이 불안을 없애는 방법 말고는 없다. 헌법정신이 아니라, 정치적이든 개인적이든 이해관계가 끼어들면 한국사회는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현대사회, 특히 한국사회가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것은 너무 적은 소수에게 권력과 권한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1인에게 막강한 권력이 집중된 나라다. 윤석열 내란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대통령의 잘못된 욕망이 작동하면 수천만 국민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권력은 쪼개고 분산해 놓지 않으면 언제든지 공동체를 파괴하는 수 있는 날카로운 흉기가 될 수 있다.

시민의회,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힘

지난 토요일에 국회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시민의회전국포럼이 창립을 선언하고, 한국사회에서 시민의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창립기념 심포지엄도 함께 열렸다. 시민의회는 선출된 권력독점, 다양한 사회적 폭력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는 고민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 전통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5~6세기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추첨식으로 민회를 구성하고, 행정·입법·사법의 영역에서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했다.

▲시민의회 창립대회 전체 촬영. 시민의회전국포럼 제공.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탄핵결정을 유보하면서 과연 5천만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결정을 9명의 헌법재판관에게 맡기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더군더나 헌법재판관들은 선거를 통해 권한을 직접 위임받지도 않았다. 이런 중대한 문제는 국민들이 직접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당연한 의문이자,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이웃 국가인 대만을 통해 국민투표의 효능감을 충분히 볼 수 있다. 대만은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민주주의 지수가 그리 높지 않은 국가였다. 한국이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민주주의지수가 20위 내외를 기록할 때 대만은 30위 초중반으로 불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다. 하지만 2017년 실효성 있는 국민투표법이 만들어지고 2018년에만 10건의 국민투표가 진행되면서 대만의 민주주의지수는 급상승해 21년에는 8위, 22년에는 10위, 올해 발표에서는 12위를 기록하면서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두주자가 됐다. 반면 대한민국은 올해 32위를 기록해 지난해보다 10단계나 떨어졌고 국민투표법 도입 이전의 대만과 비슷한 상황으로 추락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상승시키고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중요과제에 대한 국민발안법, 중대현안에 대한 국민투표법을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탄핵상황에서 국민들이 직접 제안하고 결정하는 국민발안법·국민투표법이 있었다면 이런 불안과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핵오염수 배출 이후에 후쿠시마 농산물 수입여부를 두고 한국 사회는 많은 갈등과 혼란이 있었지만, 대만은 국민투표를 통해 수입금지를 결정함으로써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조기에 정리했다.

시민의회는 국민발안과 국민투표 등으로 다룰 이슈를 선제적으로 논의하는 기구라 할 수 있다. 생업에 바쁜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는 없고, 전체 국민이 참여하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예상되니 추첨식으로 표본 추출된 국민들이(작은공중, mini公衆) 전체 국민을 대신해 일정한 학습과 토론을 거치면서 어떤 방식으로 현실화하고 제도화할지를 우선적으로 논의하고 제안하는 기구라 할 수 있다. 제안된 것들은 사안에 따라 기존의 국회가 결정할 수도 있고, 최종적으로는 전체 국민이 결정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많은 갈등과 사회적 비용은 시민의회를 통해 크게 낮추고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시민의회전국포럼 창립 취지이고 생각이다.

시민의회로 집단지성 모으고, 국민투표로 제7공화국을 결정하자

12·3 내란사태가 아직 어떤 식으로 종결될지는 모른다.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의 탄핵을 선언하는 것이 다수 국민들에게 합리적으로 상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지난 역사에서는 보는 것처럼, 개별 인간들은 그리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최근에 법원과 검찰 등에서 비상식인 결정들이 자주 등장하면서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계속 대한민국을 갈등과 혼돈상태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 전체 국민들의 집단지성에 묻는 것이 가장 정의롭고 효율적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윤석열의 탄핵여부를 결정짓고, 국민들이 지지하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켜 시민의회를 통해 국민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헌법초안을 마련해야 한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래 대한민국에 6번의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한번도 시민들은 직접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밀실에서 권력자들에 의해 비밀스럽게 만들어졌고, 시민은 반쯤 강제적으로 도장 찍는 역할이나 해야 했다.

한국 사회는 추락과 상승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시민의회를 통해 시민들의 집단지성을 모으고, 국민투표를 통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제7공화국을 선택해야 한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는 말이다. 주권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주인이 되지 못하면 돈과 권력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복지국가, 행복사회는 주권자들이 제7공화국을 만들 때에 비로소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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