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비상계엄 그리고 탄소중립

[초록發光] 헌법 위반 선을 넘은 대통령과 탄소중립 목전의 무책임한 인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다양한 복선과 해석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원래 제목으로 고려되었던 '데칼코마니'는 종이에 물감을 칠한 뒤, 반으로 접으면 똑같은 그림 두 개가 만들어지는 미술 기법을 가리킨다. 이처럼 쌍둥이 같은 판박이의 모습을 통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려 했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확정된 제목과 관련해서는 반지하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왜 기생충으로 비난받아야 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이런 논란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쟁점은, 누군가 그어놓은 '선(線)'을 둘러싼 해석이다. 예를 들면, 부유층을 상징하는 박 사장의 반복되는 요구였던 "선을 넘지 말라"는 대사뿐만 아니라, 장면마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유리창이나 카메라 앵글을 통해서 선을 넘을 듯 말 듯 했던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서도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게다가 이듬해에 재개봉했던 흑백 영화의 포스터에서는 "넘지 못할 선은 없다"라는 감독의 문구마저 전면에 포함되었을 정도였다.

이때 영화에서 말하는 '선'은 지배계급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경계를 가리킨다. 일개 운전기사가 상급자의 사생활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선을 넘은 행위였으며, 고용주가 앉아있는 자동차 뒷좌석으로 스멀스멀 풍겨오던 냄새는 태생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하층민의 근성이 선을 넘어 지배계급을 찡그리게 만들었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미국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던 아카데미의 작품상에 선정됨으로써, 현실에서 마저 선을 넘어버린 사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서는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선을 넘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말았다. 김민석 의원의 계엄 경고를 철 지난 운동권의 망령이라며, 모두가 무시한 채 흘려들었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다행히 국회의 발 빠른 대응 덕분에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침이 밝아오기도 전에 계엄이 해지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비상 선언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아직까지도 탄핵은 마무리되지 않았으며, 급격한 환율 하락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넘지 못하는 선은 없기 때문에, 행정수반이 국가의 안위를 회복하기 위해 충분히 넘어도 되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허용될 수 있을까? 현재 탄핵안이 발의되어 검토가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몇 가지 논란은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법률 해석의 차이를 놓고 다툼이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헌법을 위반한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 윤석열 대통령의 12월 12일 대국민 담화. YTN 유튜브 화면 갈무리.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주화된 국가에서 헌법은 삼권 혹은 이권 분립의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중세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독재적 통치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찾아낸 유일한 대안이 국가 권력의 분할을 통해 상호 견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입법부는 법률과 예산만을 결정하고, 행정부는 정책을 집행하며, 사법부는 헌법을 수호하도록 권한이 나눠진 것이다. 국회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고 의결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헌법기관인 국회의장과 의원들을 구속하려는 대통령의 명령은 위헌적인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 넘지 못할 선이 없듯이, 헌법도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잠시 넘어도 되는 선일까? 통상적으로 헌법은 최상위 법으로 여겨진다. 즉 수많은 법률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가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사실 헌법은 국가의 구성에 관한 법률을 의미한다. 따라서 헌법은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법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배계급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틀이라면, 혁명적으로 뛰어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헌법은 해방 이후 국민들이 동의하고 합의를 통해 유지·발전시켜 온 법률 체계이다. 그렇기에 비상계엄이라는 위헌적 행위야말로 반국가적인 조치로 처벌이 필요할 수 있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헌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헌법이라는 소중한 선을 넘어버린 통치자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한계선이 존재할까? 1992년 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된 이래로 30년 넘게 논의를 거듭해 온 끝에 국제사회가 합의한 마지노선이 섭씨 2도이다.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래로 이미 1도나 증가한 상황이기 때문에, 1.5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희망적인 차선책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유엔의 한계선을 넘지 않기 위해, 세계 각국은 2050년 탄소중립이라는 국가별 목표치까지 제시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2025년 새해를 맞이해서 내다보는 전망은 밝지 않다. 세계 최대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은 여전히 석탄 발전을 확대하고 있어서, 2030년 탄소정점에 도달한 이후 2060년 탄소중립까지 이행하겠다는 '쌍탄' 목표가 불투명해 보인다. 이어서 3위의 기후 악당인 인도는 2070년으로 가장 늦은 목표 기한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응과 비교했을 때에도 전혀 적극적이지 않은 편이다. 심지어 오랫동안 세계 1위였다가 2위로 한 단계 물러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불신론자라는 오명까지 지니고 있다. 실제로 1기 집권기에는 파리 기후협정을 탈퇴한 이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1월 20일에 다시 취임하자마자 바이든의 재가입을 다시 한번 무력화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되는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에 대해서는 탄핵으로 국가를 정상화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지구 생태계의 기반이 되는 대기 시스템을 망가뜨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유엔이라는 초국가 협의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일까? 많은 미국인들은 국제 관료조직이 무능하고 돈만 많이 지출해서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임 트럼프 대통령은 대놓고 유엔을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2024년 지구 평균온도는 이미 1.5도 목표를 초과한 첫해로 기록될 정도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이 아닌 한계선으로 제시된 2도의 선을 넘었을 때, 과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미래세대가 현세대에게, 혹은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선조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넘지 말아야 하는 기준선을 넘었을 때에는, 타인에 의해 탄핵당하기 전에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2025년의 대한민국 대통령도 그렇고, 80억 인류도 생태계에 의해 탄핵당하기 전에 반성과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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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나라를 보호하는 에너지 정의, 기후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기후 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추구하는 독립 싱크탱크입니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로, 한국 사회의 현재를 '녹색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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