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에게 정원을 맡긴" 후, 헌법재판소의 시간 앞에서

[민교협의 새로운 시선] 독일의 헌재와 한국의 헌재

법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문명적 성취 중 하나라는 점을 오랜 기간 잊고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사회적 불공정이 갈등을 초래하는 양상에 대해 논의하는 데만 익숙했을 뿐, 사회적인 갈등이 법적인 제도와 절차를 통해 이성적으로 해결되는 양상에 대해 비교적 덜 주목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법이 사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숨죽여 지켜보도록 강요받고 있다. 비교적 신생의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지난 30여 년간 조용히 쌓아온 사회적 신뢰가 아니고서는 이 숨 막히는 시간에 현재와 같은 사회적 평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독일의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를 모델로 하여 1988년에 만들어졌고, 이는 국제사회가 헌법재판소와 관련하여 보인 일련의 흐름 가운데 있었다. 에스파냐에서 독재자인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인 1975년에 독일헌재를 모델로 해서 헌법재판소를 설립했고, 1989~1990년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도 독일헌재를 본보기로 자국의 헌법재판소를 만들었다. 따라서 독일헌재가 어떤 사회적 논의를 거쳐 만들어졌고 어떤 역사적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우리 헌법재판소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깊게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2차 변론기일인 16일 헌법재판관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독일 헌재의 위상

헌법재판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미국 연방대법원(US-Supreme Court) 유형으로서, 일반 사법심사와 헌법재판의 기능이 통합된 단일모델이다. 호주,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과 남미 국가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미국의 경우 1803년 "마버리 대 메디슨(Marbury vs. Madison)사건"으로부터 헌법재판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인 "규범통제", 즉 일반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에 대한 사법심사권이 시작되었다.

일반법원과 헌법재판소를 구분하는 두 번째 유형의 분리 모델의 아이디어는 오스트리아의 한스 켈젠(Hans Kelsen)에게서 왔다. 합스부르크 왕국이 그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체로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된 규칙이라고 헌법을 이해했던 그는 이 기본적인 합의가 무력화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로 독립된 헌법재판소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켈젠의 이론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는 1920년에 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다. 최근 몇 년간 유럽에서는 이 분리모델이 우위를 점하는 추세이다.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존재하거니와, 국가 기관들 간의 분쟁, 중앙정부와 주정부 간의 분쟁, 그리고 일반법률이 헌법에 합치되는지를 검토하는 규범통제를 넘어, 공권력에 의해 기본권이 침해되었다고 판단한 개인 시민에게 헌법소원을 허용하고 있다. 2020년 현재 헌재에 제소된 사건 중 96.5퍼센트가 이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독일의 선택은 물론 나치가 가져온 파국에서 비롯되었다. 전후 독일사회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독립적인 헌법재판소를 설립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다른 헌법기관과 달리 헌재는 1949년이 아니라 1951년에야 구성되었다. 제헌의회(Parlamentarischer Rat)가 헌재의 구체적인 조직에 관한 세부사항을 독일 헌법인 기본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연방의회로 넘겼던 탓이었다. 이 신설기구의 조직화에 대한 쟁점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독립적인 헌법재판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해소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법무부가 주장하듯 헌재가 연방재정법원, 연방노동법원, 연방행정법원, 연방사회법원, 연방대법원 등 여타의 5대 최고 연방법원과 마찬가지로 법무부의 감독을 받는 기관이어야할지, 아니면 헌재 자체가 주장하듯 연방상원, 연방하원, 연방대통령, 연방정부 이렇게 네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 헌법기관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의 문제였다. 개소초기부터 법무부와 계속 갈등했던 헌법재판소는 1952년 "지위-각서"(Status-Denkschrift)를 통해서 헌재를 일반 법원 시스템에서 분리하고 법원의 행정을 헌법재판소장에게 맡길 것, 법원에 독립된 예산을 할당할 것, 그리고 재판관들에게 장관 또는 국회의원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할 것 등을 요구했다.

당시 권력을 나누어야할 별도의 기구를 원치 않던 아데나워 정권은 헌재가 일반 법원처럼 연방법무부의 관할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야당이던 사회민주당(SPD)은 정부를 더욱 효과적으로 견제하고자 별도의 예산을 가진 독립된 헌법 기구의 탄생을 지지했다. 결국 헌재는 연방의회의 지지를 통해 사법부 및 법무부로부터 제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고, 그 결과 현재 독일헌법재판소장은 의전서열 상 연방대통령, 연방총리, 연방의회의장, 연방상원의장에 이어 5위에 해당한다.

현재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는 거의 모든 사안들이 헌재에 회부되어 헌재의 소재지인 칼스루에(Karlsruhe)에서 논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의 칼스루에화"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리고 칼스루에에서 내려진 결정은 아무리 논쟁적인 주제일지라도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다. 학교에 십자가를 거는 것이 종교의 자유에 위배된다는 1995년 헌재의 판결에 대해 가톨릭 색채가 강한 바이에른 주지사 에드문트 슈토이버(Edmund Stoiber)가 "내용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중한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헌재 결정이 독일사회에서 수용되는 양상을 상징한다. 2024년 현재 기관신뢰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헌재는 78퍼센트의 지지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0년의 경우 80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2위를 기록했다. 순위가 낮아진 것은 주로 극우정당 지지자들이 헌재에 대해 압도적인 불신을 표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독일헌재의 조직

독일헌재의 조직은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독일헌재는 제1재판부와 제2재판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재판부는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안 법원으로서, 그리고 제2재판부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혹은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등 국가기관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이 기관들이 헌법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감독하는 법원으로서 그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의 활발한 참여로 인해 제1재판부의 업무량이 과다해지면서, 제2재판부로 업무가 상당부분 이관되었다.

또한 재판관의 숫자도 큰 변화를 겪었다. 1951년 24명으로 출발했고, 1956년에 20명으로 축소되었다가 1963년부터 현재의 16명으로 결정되었다. 헌재 재판관은 상하 양원이 절반씩 선출하도록 되어있고, 특정 정당만의 지지를 받았다는 의혹을 없애기 위해 최소 3분의 2 이상 의원들의 지지를 얻도록 설계되어 있다. 최근 수년간 대다수의 헌재 판사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후보만이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헌재와 달리 헌재 판사들이 직업 판사로만 구성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1차 및 2차 법률 국가고시를 합격하는 것을 자격 요건으로 삼고 있지만, 판사 중에서만 선발하지는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각각 최소 3년 이상 최고 연방법원 중 한 곳에 근무한 판사 세 명이 1, 2재판부에 포함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다른 5명의 헌재 판사는 이에 해당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헌재가 설립될 당시 보수적인 여당이던 기민련/기사련 측에서는 정치적인 고려 없이 법률에 따라서만 판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직업 판사로만 자격 요건을 제한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사민당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법률적인 관점에서만 결정되기보다 정치적인 맥락 전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며 이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여당의 제안은 사민당뿐만 아니라 연정에 참여하고 있던 자민당의 반대로 기각되었다. 헌법의 문제는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도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해당 사안의 정치적인 의미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구성원들이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헌법재판관의 직업적 다양성을 통해서 독일헌재의 시야를 넓히려 했던 의도는 초대 헌재에서 가장 잘 관철되었다. 1951년 초대 헌재 재판관 24명 가운데 변호사 10인, 재계 인사 6인, 의회와 행정부 출신 5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024년 현재 직업 판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현 헌법재판소장인 슈테판 하바트(Stephan Harbarth)가 기민련/기사련 원내 교섭단체 부대표 출신이었던 사실은, 독일 헌재가 법과 정치의 경계에 서는 것에 대해, 최소한, 크게 주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과 4주전인 2024년 12월 19일과 20일 독일 사회는 헌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원래 헌법재판소의 설치, 임무 및 구성은 기본법 92조부터 94조에 규정되어 있지만, 헌재의 구체적인 구성에 대한 사항은 일반법인 연방헌법재판소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연방헌법재판소법을 기본법 93조 및 94조에 통합시켜서 국회의원 과반이 아니라 3분의 2의 지지를 통해서만 헌재 관련 법규 개정이 가능하도록 바꾼 것이다.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극우정권이 들어서고, 이들이 헌법재판소의 권한들을 박탈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우경화를 도모하는 것을 간접 경험한 이후 독일 사회는 헌재가 "민주주의의 적에 맞서고",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제적인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역사상 드문 행보인 셈이다.

다시 헌재의 시간 앞에서

헌재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는 것에 비례하여 헌재에 대한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헌법재판에 대한 이런 비판이 헌법재판권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863년 프로이센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만약... 법원이 소집되어 헌법 위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면, 이는 판사에게 입법자의 권한을 부여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에게서 유래한 "사법의 정치화"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이르러 칼 슈미트(Carl Schmitt)에게서 반복되었다. 바이마르 시기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로서 헌법 논의에 적극 참여했던 칼 슈미트는 헌법재판권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권력 분립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판사들이 법을 적용하는 역할에 국한되어야 하며, 법에 대한 검토를 담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헌법에 관한 재판이 허용될 경우 법원이 정치적 기관으로 전환되어 "사법의 정치화" 양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헌법을 적으로부터 보호할 주체는 결국 모든 이해관계의 대립을 초월하여 민족의 통합을 이루어내는 존재인 제국 대통령이어야 했다. 법 자체가 정치적 활동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이상, 법과 정치가 뚜렷이 구분되기는 어렵다. 하물며 사회 구성원들 간의 기본적 합의이자 법률이라는 규칙을 생성하는 원리인 헌법, 그리고 그 헌법을 보증하는 수단인 헌법재판소가 일정 정도 정치적인 기관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의 사상적 근원을 제공한 한스 켈젠(Hans Kelsen)은 헌재가 사법적 객관성의 외피 뒤로 숨기보다 오히려 사법 기관임과 동시에 정치적 기관의 역할을 떳떳이 인정할 때 권력에 대한 통제라는 헌법의 주된 기능을 보다 잘 수행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권력 분립은 그 자체로 절대선이 아니며 상호견제를 통한 권력 통제라는 목표를 위한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켈젠은 슈미트의 말대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과 같은 기관이 "헌법의 수호자"가 된다면, 오히려 가장 먼저 헌법 위반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두고, "염소에게 정원을 맡기는 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헌법재판소를 통해 "정치의 사법화" 혹은 "사법의 정치화"가 나타나는 것은 헌재의 부작용이 아니라, 헌법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법과 정치 사이에 설 수밖에 없는 헌재의 존재에서 연원한 것이다. 1951년 독일사회는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권을 제도화하기로 선택했으며, 우리 사회도 이미 1988년에 같은 선택을 한 셈이다.

독일헌재 판결문의 첫 문장은 항상 "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이다. 국민주권은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근간이며, 이 국민주권은 법치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간접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입법에 관여하고, 그 결과 법에 복종함으로써 국민주권을 실현하게 된다. 법원의 결정이 특정 정당이나 그룹의 개별적 가치나 이익에 부합하는지와 무관하게 헌재의 결정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헌재의 "침착한 심사숙고"(sober second thought)를 거친 결정을 통해서 "염소에게 맡긴 정원"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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