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 '나'와 '우리’'

[언어가 언어에게] ⑦

대부분의 위인들은 살인자

어릴 때부터 우리는 역사 속 위인이나 성인 등을 존경하고 그 사람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초중등학교에서 대학까지 16년의 긴 시간 동안 선생님들과 어른들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고 세뇌(?!!)당했습니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유명한 정치 지도자나 사회운동 지도자들, 철학자나 성직자들을 우러러 보면서 내 삶의 지표로 삶기도 합니다. 모두 나같은 범인은 도저히 본받아 실천할 수 없는 저 멀리 구름 위의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저 멀리서 매달 존경의 표시로 회비나 후원금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신이 이 지상으로 내려보낸,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다르게 태어난, 클 위(偉) 클 대(大) 크다는 뜻의 글자를 2개나 이어 만든 위대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구했다고 우리가 존경하는 역사 속 위인들은 대부분 살인자들입니다. 왜구에게 망하기 직전의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도 살인자입니다. 수많은 일본군을 죽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북한 인민들은 '어버이 수령'으로 추앙하겠지만, 많은 대한민국 인민들은 거의 살인마로 인식하고 증오하기도 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황제도 전장터에서 숱한 인민들을 죽인 학살자였습니다.

자비행을 실천한 성인과 위인, 살인자 위인, 두 사람의 차이는 종이 한 장보다 얇습니다. 붓다와 예수를 비롯해서 수없이 많은 깨달은 자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칼을 들고 사람 가슴을 찌를 것인지 그 사람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탐욕의 오랏줄을 잘라버릴 것인지는 단 한 순간 한 번의 호흡으로 결정이 납니다.

붓다가 어느날 새벽에 왕이 될 미래를 내던지고 출가를 결행한 것도 지금 여기 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가 유대 민족해방투쟁 전사의 길로 나서지 않고, 맨 밑바닥 최하층 천민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지상에서 지금 여기 천년왕국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한 번 숨을 크게 쉬고 발걸음을 내딛은 그 순간 결정된 것입니다.

위인은 하찮은 존재, 지금 여기 내 삶에 견주면?

내가 존경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삶은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그 어떤 위대한 역사 속 위인도 나보다 위대하지 않습니다. 붓다도 예수도 황진이도 요석공주도 신사임당도 강주룡도 내 삶에 견주면 하찮습니다. 잔다르크도 유관순도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내 삶에 견주면 그저 1g도 무게가 없는 내 마음 속 이름일 뿐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그 이름과 그 이름이 불러오는 서사(story)의 기억 시냅스를 비활성화시키면 내 삶에서 위인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존경하지 않는 삶은 내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부터 존경하고 사랑해야 다른 사람도 나를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나를 존중해야 내가 다른 사람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존중해야 나의 나인 너를 존중하고 '우리'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입에서 나왔다 하면 @#@$%&*!! 쌍욕 투성이의 나를 내가 존경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유튜브나 보면서 하루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나를 내가 존경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 땅 이 순간의 내 삶을 온전하고도 지극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존경하고 떠받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한자로는 정념(正念), 빨리어로는 싸띠(sati)라고 말합니다.

나를 존경하고 다른 생명체도 존경하는 것이 자비행입니다. 다른 사람과 지구별 다른 생명체를 존경하고 존중하려면 나, 자아, 자의식을 비워야 합니다. 나를 공(空)하게 비워야 다른 사람의 색(色, 몸과 마음, namarupa)이 내게 들어옵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붓다 가르침은 무슨 고난도의 수학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21세기 정보와 지식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을 뜨고 이치에 맞게 생각해서 금방 꿰뚫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선시로 유명한 오현(오현) 스님의 선시는 대부분 이런 깨달음의 법문으로 차고 넘칩니다. 시인의 이름은 오현이고, 절에서의 이름은 설악무산(雪嶽霧山)이었습니다.

한 60쯤 되니까, 선지식이 누군지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 삶의 스승, 인생의 스승이 내 근처에 있구나... 어촌 주막에 있는 주모가 선지식이고, 어부가 선지식이구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누워 있는 노숙자가 하 내 삶의 선지식이로구나.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 나의 스승이요, 선지식이로구나. - 설악무산문도회 엮음, 설악무산의 방할, 「염장이 이야기가 팔만대장경」

많은 사람들은 오현 스님을 그의 술과 기행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스님이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의 총칼 아래 수배되어 잠수타는 이른바 바리'들로부터 전두환과 비슷하게 예상 액수보다 영이 하나 더붙은 거액의 봉투를 준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런 스님의 봉투를 받을 수 있는 인연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실 한 번 뵌 적도 없습니다.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 ⓒ만해마을

오현 스님의 거리낌 없는 자비행

제가 오현 스님을 처음으로 만나 보게 된 인연은 곽병찬 작가가 오현 스님에 대해 쓴 글입니다. 김형태 변호사가 적자를 보면서도 꾸역꾸역 발행을 계속하고 있는 격월간 잡지 󰡔공동선󰡕에 일종의 짤막한 평전으로 작년부터 세 차례 연재했습니다. 공동선에는 울림이 있는 좋은 글이 참 많습니다.

곽병찬은 1980년 10월 27일 이른바 '10.27 법란' 당시 신흥사 주지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벌어진 스님의 일화를 적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돈과 여자 문제를 잔뜩 늘어놓은 수사관들의 시나리오를 다 읽어보지고 않고 그대로 쓰고 지장을 찍겠다고 하는 오현 스님의 태도에 오히려 수사관들이 당황합니다. 대신 스님은 부패 타락한 '낙승(落僧)'으로 한국에서는 살 수가 없으니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타협을 합니다.

저는 오현 스님의 명색에 대한 깨달음, 즉 세상의 평판이건 명예건 그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을 접하고는 아 한국에도 이런 깨달은 자 붓다가 적지 않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도 모르는 스님이 미국에 도착해 아는 사람도 없고 보안사 수사관들이 마련해 준 돈도 다 떨어졌을 때 스님이 선택한 행동도 그의 무애행이 어떻게 대중 속으로 스며드는지 일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 마지막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산 양주를 나발불고 있는 까까머리 동양인 중을 생각해보십시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영화 속 한 장면입니다.

스님의 길거리 양주 퍼마시기 행위예술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스님은 붓다가 아니라 예수를 하느님으로 섬기는 한인교회를 비롯해서 나중에는 미국의 유명 대학에까지 초청을 받게 됩니다. 오현 스님의 붓다 가르침에 대한 촌철살인 법문은 몇 마디 말만 들어도 참 단순명쾌합니다.

해외 포교를 한다고 거액을 들여 미국에 거창한 한국식 절을 짓고 빈수레 홍보선전 활동을 요란하게 벌이는 세태와는 처음부터 사뭇 다른 접근입니다. 공중부양과 가부좌처럼 하늘과 땅의 천양지차입니다.

절에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무애행의 스님 법문에 부처님 가르침이 있습니다.

설악무산의 방할은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이런 오현 스님의 명색을 버린 가르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벽암록이니 육조단경이니 잘 이해할 수도 없는 한문 투성이의 지식인용 중국 선사들의 기행 기록보다 백배 천배 나은 언어 탈출의 간화선 법문입니다.

그 형님에 그 동생

'말한 바 없이 말하고 들은 바 없이 듣다'. 오현 스님과 지혜 스님의 선시와 선화집입니다. 이 책도 저는 얼마 전에 처음 접했습니다. 맨 처음 책을 펼쳤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목 그대로 심호흡을 하면서 혀와 귀의 감각기관 시냅스를 최대한 활성화시키지 않고, 조용히 잠들게 하고, 그저 무심히 손 가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들춰 보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시신경 시냅스가 모두 깨어나 글과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봄날의 꽃, 한 여름 소나기, 가을밤 달빛, 겨울 눈. 산과 강, 나무잎과 꽃, 오두막과 기와집, 나룻배와 낚시하는 어떤 사람 등등 세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오현과 지혜, 두 무애행의 수행승이 거기 있었습니다.

아무 시나 적어보겠습니다.

...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까고 죽은 하루살이 떼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아득한 성자」

성자가 별 게 아니고, 그저 아득한 하루살이떼가 성자고,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본 게 성자라는 오도송의 선시입니다.

붓다가 별 게 아니고, 모든 중생이 본디 붓다입니다.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가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 「내가 나를 바라보니」

형님인 오현 스님의 시를 동생인 지혜 스님이 그림으로 변환해 중생들 눈에 내가 나를 바라보는 알아차림의 이미지를 선물로 줍니다. 그 형에 그 동생입니다.

초지능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지금 여기, 생명으로 쓰고 그린 선시와 선화(禪畵)

저는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그저 눈으로 보고 그 순간의 느낌을 존중합니다. 이른바 그림 전문가의 해설은 '하찮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중생인 저의 본디 느낌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그 느낌대로 그림을 제 마음 안에 받아들입니다.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을 많이들 보았을 것입니다. AI가 지혜 스님의 선화를 패턴으로 딥러닝해서 그린 그림은 아마도 지혜 스님의 원 그림과 거의 똑같을 것입니다. 지혜 스님 스스로도 구분을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두 그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무엇이라고 딱히 명확하게 설명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조만간 그 심연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AI가 그린 지혜 스님의 선화는 기계 지능이 전기 신호로 변환해서 그린 확률 숫자입의 덩어리 결과물입니다. 지구별 생태계에 연결된 생명체, 온전한 하나의 소우주인 지혜 스님이 온몸과 마음을 다해 벌레를 받아들이고, 똑같은 생명체의 인드라망 그물코로서 폈다가 오그라들었다가 공명하며 그린 그림과는 출발부터 다릅니다. 지혜 스님의 선화는 오현 스님과 벌레와 함께 생명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초지능의 등장을 앞두고 모든 인간지능의 패턴과 인식, 세계관 자체가 흔들리고 급격하게 혼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전에 오현과 지혜, 두 붓다의 보살 형제가 그린 선시와 선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루살이인 제게는 기적의 인연이었습니다. 기적의 눈뜸이자 기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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