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핫도그 튀겼지만 퇴직금으로 식용유 2통만을 받았다

[전수경의 MZ 여성 그리고 빈곤] 모자란 어른들의 사회에서의 미음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릴 것을 요구받고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받는 일은 고된 일이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일찍부터 견딘다. 경쟁력은 키우고 부족한 것은 보완하라고 요구받는다. 특성화고에서 직업교육을 받는 이들과 대입 수능을 준비하는 이들이 받는 압박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런 의문을 갖는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10대의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십 년을 살고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 아래 고생하는 이들이 안쓰럽다.

그러나 나의 안쓰러움이 무색하게도 10대 후반의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차가운 시선으로 돌아보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시스템에 적응한다. 노동시장에서 통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궁리하고 다듬는다. 모자란 어른들이 만든 사회에서 일찍 철든다.

미음은 행정구역 군 단위에서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목표는 정해져 있었다. 성적은 최상위로 유지하며 오차없이 계획적인 일상생활 관리와 극내향성의 성격은 외향형으로 개조한다. 회계, 사무, 디지털정보를 다루는 자격증들은 기본이므로 부연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3년을 벼리며 미음이 준비한 것은 대기업의 금융 관련 사업에서 대면업무를 담당하는 파트였다. 기업들로부터 해마다 서너 명의 쿼터가 학교로 배정되어 왔다. 미음은 가족의 지원이 없어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용돈이 거의 없는 생활이었지만 아르바이트는 자제했다. 자기관리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경제적 정서적 지원의 망이 거의 없는 환경에 대해 미음이 거의 언급하지 않아서 오히려 마음이 쓰였지만 인터뷰를 마치면 떠날 사람으로서 속 깊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

미음의 감정이 폭발한 것은 미음의 노력을 학교가 무(無)로 만들었다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전하면서였다. 미음의 한 해 위 선배들이 취업할 시즌부터 징조가 있긴 했다. 대기업에서 오는 쿼터를 바라보며 준비를 하던 서너 명의 선배들이 그때도 있었다. 지원하면 100% 합격할 학생들이 원서를 넣도록 관리하는 것이 학교의 할 일이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손 놓고 있었다. 학생들이 알아서 원서를 분배하고 성적이 안 좋은 이가 지원하는 일이 일어나고 합격하지 못했다. 성적이 안 좋으면 지원도 못 하나,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보장된 자리에는 보증 가능한 사람을 보내야 신뢰가 깨지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 배당된 대기업 일자리가 날아갔을 때 2학년 학생들은 술렁거렸지만 미음은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게 되면 헤어져 못 보고 있는 남동생을 데려와 같이 살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쿼터가 줄어 있었다. 한 장 내려온 원서의 기회는 미음이 아니라 다른 동기에게 돌아갔다. 교실에 들어선 선생님들이 코 수술, 쌍꺼풀 수술을 교과목에 있는 것처럼 늘 진지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외모가 입사 당락을 결정한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러나 현실적인 기준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굳이 말하자면 미음은 선생님들이 말한 합격 기준에 안 맞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문에 걸려있는 합격축하 플래카드는 미음이 아니라 동기의 것이었다.

그 실망감과 학업에서의 노력을 말할 때, 시스템에서 생존해 더 나은 환경으로 나아가고자 한 자신을 지탱하던 버팀목이 부서진 듯, 좌절한 미음이 보였다. 가라앉지 않은 마음에 학교가 싫었다. 2학기가 되어 현장실습을 나가야 할 때 미음은 학교에서 먼 관광도시의 리조트로 갔다. 미음이 맡은 프론트 업무는 12시간 맞교대로 돌아갔다. 리조트 측은 실습생이 할 수 있는 하루 7시간의 노동에 대한 급여는 통장으로 부치고 나머지 노동에 대한 시급은 현금으로 받으라고 했다. 잠이 부족했고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중노동같은 4개월의 실습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미음은 졸업을 했다.

달리 갈 곳이 없던 미음은 누군가 일자리를 마련해주면 돌아보지 않고 잡았다. 졸업하고 처음 2년은 핫도그를 튀겼다. 아침에 오픈해서 저녁에 닫을 때까지 미음 혼자서, 주문을 받고 핫도그를 기름통에 넣고, 서비스를 하고, 하루 매출을 정산했다. 핫도그를 기름통에 넣을 때 가끔은 손가락도 같이 들어가고 기름방울이 크게 튀면 팔목까지 얼룩이 졌다. 기름통에 손이 닿으면 처음 1,2초는 뜨겁다기보다 아팠다고 한다. 통각이 먼저 오고 끓는 기름의 열을 알아챌 때는 이미 화상을 입은 뒤다. 허투루 하는 게 없는 미음의 일처리에 사장은 흡족해 했다. 인근 군에 추가로 연 매장으로 가 달라고 사장이 요구했다. 미음이 일하던 첫 번째 매장에는 두 명의 알바가 채용됐다. 지역사회에서 사장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었다. 연장근무수당도 연차도 받아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요구하지 못했고 2년을 일한 값으로 퇴직금 대신 식용유 2통을 건넬 때 사장을 고발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연합뉴스

사무직으로 옮겨갔다. 주 업무는 회계였지만 남성 직원들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책상을 닦고 커피믹스를 채워 넣었다. 화분에 물주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아서 버텼다. 다른 여성 직원이 했다. 미음은 화분이 그냥 싫었을 수도 있지만, 4년을 일하면서 안 하겠다고 거부한 일이 있다는 것이 괜찮게 느껴졌다. 다시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소개로 들어온 이 직장에 주저 않으면 벗어날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미음에게 생겼다. 그만둬야겠다고 말함과 동시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인근 대도시에 제빵 학원을 다닐 것이고 집도 구해 놓았다고 대본을 짰다. 그리고 실행했다.

도시에 방을 얻어 제빵 학원에 다녔고 제과 제빵 자격증 공부를 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빵집을 낼 수도 있으리라. 빵집 알바도 시작했다. 빵집 일을 시작한지 한 달이 되어가던 어느 아침 손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들 수 없었다. 뼈가 부러졌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병원에 갔다. 고등학교 때 컴퓨터를 다룰 때부터 손목은 항상 혹사하는 상태였다. 빵집에 이르러서 마침내 참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의사는 손목 염증이 매우 심해져 사용하면 안 되는 상태라고 했다. 여기까지의 여정을 들으면서 누구라도, 잠시 쉬어야 하는 것은 미음의 손목 뿐 만이 아니라 미음 자신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마음과 몸이 쉬어 본 적 없는 미음에게 피할 수 없는 휴식이 찾아온 것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제빵의 꿈을 잠시 미루는 동시에 바로 사무직 일자리를 찾았다. 두 손목을 번갈아 치료하면서 키보드를 쓸 수 있다. 남동생도 찾았다. 도시에서 남매는 자리를 잡고 있다. 한 주 식비 5만원으로 장을 보면서 효능감을 느낀다. 남동생의 통장을 관리한다. 남동생이 다니는 공장에서 직원들 사회보험료를 횡령하고 있다는 걸 동생의 건강보험료 연체 고지서를 보면서 알아냈다. 미음은 더 꼼꼼하게 챙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미음은 고등학교 3학년의 겨울을 다시 떠올린다.

"수시 넣었지?"

리조트에서의 고된 실습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선생님이 물었다. 미음은 대입 수시에 넣지 않았다. 미음의 성적이면 대입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대학 진학 여부를 고민조차 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돌아볼 수밖에 없다. 학비를 생각하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도 감당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되짚는 미음을 보면서 학비가 아니라, 학생에 대한 책임을 다 하지 않는 학교와 퇴직금 대신 식용유를 건넨 핫도그가게 사장 같은 어른들의 세계가 차갑게 다가왔다. 미음은 일을 하는 동안 사이버대학교를 마쳤다.

떠나온 세계로 돌아가 언젠가는 작은 빵집을 내고 싶다. 나고 자란 군으로 돌아가고 싶은 미음의 마음은 지금 도시에서의 외로움 때문인가 생각한다.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받은 지원금은 손목 치료비로 몽땅 나가는 모양이었다. 많이 아프니 치료도 세게 할 테지만 치료비가 평소에 들은 수준보다 너무 높았다. 일하다 생긴 병에 사회보험은 고사하고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받은 지원금조차 병원에 갖다 주어야 하다니 야속했다.

말을 할 때의 정확한 발음과 단정하고 꼿꼿한 외형을 보며 미음의 고등학교 생활이 그려졌다. 그러나 그 수련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혼자 헤쳐가기에 그럭저럭 보통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충분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좋은 어른 좋은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이제는 버릴 때도 된 것일까.

* 이 연재는 2023년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이 함께 한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만난 여성들, 노동건강연대가 활동하면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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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간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노고에 언제나 감탄하고 감사하고 존경한다. 할 수 있는 건 말, 쓸 수 있는 건 글, 고마운 마음을 글로 전하고 싶다. 달리기는 못 해도 걷는 건 조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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