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어디까지 가나? 레바논서 삐삐 이어 무전기 폭발로 사망 32명

이틀간 사망자 32명·부상자 3000명 이상…이스라엘 국방 "전쟁 새 국면·북부로 중심 이동" 전면전 위협

레바논에서 17~18일(이하 현지시간) 무선호출기(일명 삐삐)와 휴대용 무전기(워키토키)가 잇달아 폭발해 30명 이상이 숨지고 30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폭발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이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와 11개월째 제한적 교전 중인 북부 국경에 집중하겠다고 밝히며 전면전 위험이 커졌다. 이스라엘이 수년 전부터 이 작전을 위해 위장 회사를 통해 호출기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18일 레바논 보건부는 이날 연쇄 무전기 폭발로 인해 수도 베이루트 교외와 동부 베카밸리에서 20명이 죽고 45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전날 레바논 전역에서 일어난 무선호출기 동시다발 폭발 사망자 수는 어린이 2명을 포함해 12명으로 늘었고 부상자는 거의 3000명에 달했다.

통신은 이스라엘 당국자들이 폭발 관련 공식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보안 소식통들이 배후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폭발은 이스라엘의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휴대전화 대신 호출기를 널리 사용하는 헤즈볼라 조직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지만 <AP> 통신은 의사, 간호사, 구급대원, 자선단체 직원 등도 헤즈볼라와 관련 단체에서 일하고 있어 이들 중 일부는 호출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전날 호출기 폭발 사망자 중 최소 2명은 의료 종사자였다. 미국 CNN 방송에 따르면 18일 헤즈볼라는 자세한 상황은 설명하지 않은 채 조직원 16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18일 무전기 폭발 중 한 건은 전날 호출기 폭발로 숨진 헤즈볼라 대원 등을 추모하기 위한 베이루트 남부 교외 장례식 현장에서 일어나 군중이 겁에 질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와 <로이터>를 보면 헤즈볼라 조직원들은 폭발하지 않은 무전기에서 배터리를 빼 황급히 금속통에 던졌고 확성기로 "휴대전화를 끄라", "배터리를 분리하라"는 공지가 나오며 장례식장이 혼란에 빠졌다.

<뉴욕타임스>는 18일 베이루트 거리에서 무전기 폭발을 목격한 후세인 아와다(54)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며 "내일은 라이터도 폭발할지 모른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면 손에서 폭발할 수도 있다"며 공포에 떨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이 배후로 추정되는 연쇄 폭발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전면전 위험이 치솟은 가운데 이스라엘 쪽은 공격 강화 의도를 시사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18일 이스라엘 북부 라마트 다비드 공군 기지를 방문해 "난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우린 적응해야 한다"며 "무게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린 병력, 자원, 에너지를 북쪽을 향해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접경 지대인 북부에서 헤즈볼라와 11개월째 제한적 교전을 벌이고 있다.

같은 날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영상 성명을 통해 "우리는 북부 주민들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헤즈볼라와의 교전으로 인해 이스라엘 북부 주민 7만 명 가량이 거의 1년째 피난 생활 중이다. 17일 이스라엘 총리실은 안보 내각이 북부 주민의 안전한 귀환을 전쟁 목표에 포함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

헤르지 할레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도 18일 북부사령부를 방문해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와의 싸움에서 "아직 사용되지 않은 많은 역량을 보유 중"이라며 북부 주민 귀환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번 통신기기 연쇄 폭발이 전장과 거리가 먼 식료품점, 장례식장 등에서 일어나 레바논 전역에 충격을 안긴 만큼 헤즈볼라는 전례 없는 수준의 보복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로이터>에 따르면 헤즈볼라 관계자는 이번 폭발로 다친 헤즈볼라 전투원 수백 명 중 다수가 최전방 지역이 아닌 베이루트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상자 중 상당수는 의료진 및 헤즈볼라 기관의 행정직, 그리고 우연히 근처에 있던 친척 등 비전투원이라고 설명했다.

호출기 폭발을 목격하고 그 자신도 파편에 맞은 베이루트의 한 의사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나는 의료 종사자지만 지금 품은 이 원한을 대대손손 전달할 것"이라며 "나는 중립적이었지만 이제 한쪽 편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레바논에서 무차별 공격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는 관련해 19일 연설에 나설 예정이다.

영국 BBC 방송 국제 편집자 제레미 보웬은 이번 통신기기 폭발 공격은 헤즈볼라에 "수치"를 주는 것이지만 "이들을 물러나게 하진 않는다"며 이번 공격이 북부 주민 귀환이라는 "이스라엘의 전략적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지역이 "전면적 직전까지 내몰렸다"고 우려했다.

다만 CNN은 지난 7월 이스라엘이 베이루트에서 헤즈볼라 고위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를 살해한 것과 이번 통신기기 연쇄 폭발 사건은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핵심 지휘·통제 네트워크에 극적으로 침투했음을 보여준다"며 헤즈볼라가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에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지적했다.

방송은 이번 폭발로 헤즈볼라 전투원 2천 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호출기와 무전기로 이뤄진 통신 네트워크도 거의 중단됐을 것으로 봤다.

민간 시설을 포함해 불특정 장소에서 수천 건의 폭발을 일으킨 것에 대한 인도적 측면에서의 비판도 거세다. 폭발이 볼커 튀르크 유엔(UN) 인권최고대표는 18일 성명을 내 "민간인이든 무장 단체의 일원이든 공격 당시 누가 표적이 된 장치를 소지하고 있는지와 그들의 위치 및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 없이 수천 명의 개인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국제 인권법 및 해당 범위의 국제인도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도 소셜미디어(SNS)를 통한 성명에서 "일상적인 민간 용품을 폭발 장치로 사용하는 것은 민간인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고 전쟁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18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바드르 압델라티 이집트 외무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호출기 폭발 사건에 대해 "미국은 이러한 사건 관련해 알지 못했고 관여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정보를 수집하고 사실을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도 17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 사건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18일 <워싱턴포스트>(WP)는 미 당국자를 인용해 이스라엘이 호출기 폭발에 앞서 바이든 정부에 레바논에서 작전을 준비 중이라고 알리긴 했지만 세부 정보는 제공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 당국자는 "레바논에서 호출기 수백 개가 동시에 폭발할 줄은 몰랐다"며 당국자들이 공격 규모를 보고 놀랐다고 신문에 전했다.

18일 <로이터>는 아랍 국가들의 요청에 따라 레바논 호출기 폭발 사건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폭발 무전기엔 일본 업체 상표…외신 "삐삐, 제조 단계부터 이스라엘 손 거쳐"

폭발물이 내장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호출기와 무전기 제조업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로이터>는 18일 폭발한 무전기에 일본 통신 업체 아이콤(ICOM) 이름이 적힌 상표가 붙어 있었고 무전기가 이 업체의 IC-V82 모델과 비슷해 보인다고 보도했다.

아이콤은 19일 관련 공지를 통해 해당 모델 무전기를 2004~2014년 중동을 포함해 해외에 판매했지만 이미 10년 전 단종시켰고 해당 제품의 배터리 또한 단종됐다고 설명하며 정품 인증 표식도 보이지 않아 해당 무전기가 본사 출고 물품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아이콤은 무전기를 모두 일본 내에서 생산하고 있고 해외 판매는 정규 대리점만을 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로이터>는 아이콤이 이전에도 단종된 모델을 중심으로 자사 무전기의 위조품이 시장에 돌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교도> 통신은 19일 아이콤 간부가 "위조품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자사 제품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7일 폭발한 호출기 또한 생산자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호출기엔 대만 업체 골드아폴로 상표가 붙어 있었지만 업체 쪽은 해당 호출기를 제조한 건 헝가리 업체인 BAC 컨설팅으로 골드아폴로는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 상표 사용만 허락했다며 제조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BAC 컨설팅 또한 호출기의 생산 주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BAC 컨설팅의 크리스티나 바르소니아르시디아코노 최고경영자(CEO)는 18일 미국 NBC 방송과의 통화에서 "나는 무선호출기를 만들지 않는다. 중개인(intermediate)일 뿐"이라고 말했다.

졸탄 코바치 헝가리 정부 대변인도 18일 소셜미디어 성명을 통해 "당국은 문제의 회사가 헝가리에 제조 및 운영 시설이 없는 무역 중개업체라는 것을 확인했다"며 폭발한 호출기가 헝가리에서 제조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외신들은 폭발한 호출기가 생산 단계부터 이스라엘의 손을 거쳤다고 당국자 등을 취재해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12명의 전현직 국방 및 정보 당국자들을 취재해 해당 호출기 생산이 실제론 이스라엘 정보 당국자들에 의해 지휘됐다고 설명했다. BAC 컨설팅이 수년 전부터 이스라엘 정보 당국의 유령 회사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BAC 컨설팅이 일반 호출기도 생산했지만 헤즈볼라로 납품되는 호출기엔 충격을 받거나 가열되면 쉽게 폭발할 수 있는 폭발물 펜타에리트리톨 테트라니트레이트(PETN)가 포함된 배터리를 심었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호출기들이 2022년 여름부터 레바논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지난 2월 나스랄라가 휴대전화가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조직원 위치 추적의 매개가 된다고 보고 호출기 사용을 확대하기로 결정한 뒤 호출기 수요가 급증해 올 여름 수천 대의 호출기가 레바논으로 배송돼 헤즈볼라 장교 등에게 배포됐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스라엘 정보 당국자들이 이 호출기를 때가 무르익었을 때 누르면 되는 "단추"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

<로이터>도 18일 레바논 고위 보안 소식통 등을 인용해 헤즈볼라가 올 봄 주문한 호출기 5000대에 모사드가 폭발물을 설치했다고 보도했다. 레바논 고위 소식통은 모사드가 "생산 단계"에서 "암호를 수신하는 폭발성 물질"을 기기에 설치했고 3000대의 호출기에 암호화된 메시지가 전송되면서 폭발물이 동시에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안 소식통은 호출기에 최대 3그램(g)의 폭발물이 숨겨져 있던 것을 헤즈볼라가 몇 달이나 감지하지 못했다고 통신에 전했다. 통신은 헤즈볼라가 18일 폭발한 무전기를 전날 폭발한 호출기와 비슷한 시기인 5달 전에 구입했다고 한 보안 소식통을 인용해 덧붙였다.

▲18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지역에서 전날 발생한 무선호출기(삐삐) 폭발 사건 사망자의 장례식이 열려 참석자들이 관을 옮기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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