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선의 저력을 모른다

[인문견문록] <조선의 힘>

친일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일본제국주의를 미화하는 황당한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에 진출하고 있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민은 심리적 소외를 경험한다고 한다. 정복자의 문화체계에 의해 열등한 자로 규정되는 '지적 소외'를 경험한 식민지민은 외부의 타자없이는 자신의 자아상을 정립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스스로를 텅빈 결핍상태로 느끼는 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없기에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규정한다. 식민제국의 힘에 압도되어 주인을 칭송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존과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식민지민 정서가 소수의 한국인에게 남겨져 있다. 문화적 식민주의는 주로 역사해석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역사학에서의 식민주의 극복을 주장하는 역사학자 오항녕의 책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을 읽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오항녕은 의외의 질문을 던지면서 책을 시작한다. "왕정은 전제적인가?" 평범한 한국인에게는 황당한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의 완고함을 파헤친다. 역사가들은 유럽 역사 속 절대주의 왕정에 대해서 '전제적'(despotoc)이라 칭하지 않는다. 가장 전제적인 정대왕정에게도 '절대적'이라 불러준다. '전제적'이란 표현이 붙는 경우는 오직 동양과 연관될 때만이다. 헤겔은 "동양사회에서는 한사람만이 자유로웠고, 그리스 사회에서는 약간의 사람이, 그리고 게르만 근대 사회에서야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이런 '동양적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에서 지금까지 이어졌다. 서양의 동양관인 오리엔탈리즘은 우리에게 내면화된다. 오항녕의 항변이다. "이러한 사고 구조는 현재 우리의 의식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틀고 있다. 일일이 예를 들기가 버거울 정도로 우리는 우리 역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전제왕권'이라 쓰지 않으면 무슨 큰 죄나 짓는 듯이 한결같이 '전제왕권'이라 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말 그대로 한 사람만이 마음대로 했고, 나머지는 죽은 듯이 살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정말 그랬나?" 우리는 왜 스스로의 역사를 서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우리는 서양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은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두었다. 탈아입구다. 일본은 동양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는 근대주의와 식민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근대에 대한 맹목적 긍정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한국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조선에서의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으려했다. 우리도 서양처럼 멋진 자본주의를 자립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시원적 축적은 막장 국가가 아니면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자국민 수백만을 노예보다 못한 처지의 부랑민으로 떠돌게 하고 도시 극빈노동자로 만드는 일은 국가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미친 짓에 불과하다. 노예의 경우 의식주라도 보장받았다. 자국민의 부랑민화와 식민지착취 두가지 없이는 자본주의는 성립하지 못했다. 자본주의를 해서 훌륭한 것이라 아니라 자본주의를 할 정도의 막장 국가였기에 자본주의를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에서 저자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 일본학자들은 조선을 '사대주의'로 매도했다. 사대주의에 빠져 당쟁을 일삼다 정작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형편없는 국가로 조선을 매도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에서 이런 일본의 관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일본의 관점을 따른다면 광해군은 명나라의 천하체계를 거부한 자주적 지도자가 된다. 한국 학자들조차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는 시각을 달리한다. 저자는 인조반정 직후 나온 인목대비의 교서를 소개한다. 교서의 내용은 이렇다.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이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쳐 죽였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케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했다."(상기책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문제삼은 것은 여러 명분 중 하나에 불과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인조반정의 부차적 명분에 불과했다. 만약에 명나라의 원숭환이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나라의 패배를 확실하게 알기에 명나라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광해군의 이복 형이었던 임해군 옥사 사건이 광해군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선조가 사망한지 불과 2주만에 임해군의 역모가 접수된다. 국문이 시작되고 임해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물고를 당했고 결국 임해군은 귀양지에서 살해된다. 임금의 형이 죽은 사건이었지만 정작 밝혀진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역모날조 사건은 결국 명나라에 알려진다. 명에서는 사신을 보내 조사를 시작한다. 광해군은 많은 은과 인삼으로 중국 관리에게 뇌물을 먹여서 겨우 무마했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원병을 청할 때도 뇌물을 상납하지 않았던 조선이었다. 광해군 시절 호조는 명 사신에게 줄 은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다. 다음은 동생 영창대군을 겨누었다. 영창대군 옹립모의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애매했다. 계축옥사가 시작되었고 조정이 텅 빌 정도가 되었다. 백성들을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10년간 이어진 궁궐공사였다. 오항녕의 추계에 따르면 궁궐공사비는 국가재정의 약 15~25%였다. 이명박시기 대운하공사가 국가재정의 7% 남짓 했던 것을 고려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이 700칸이었는데 경희궁 1500칸, 인경궁 5500칸을 합하면 경복궁보다 무려 10배나 큰 궁권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케인즈주의를 조선에 들이대며 사회복지라고 말하지만 궁궐증축을 위한 목적세인 '결포'의 신설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조반정 이후 바로 시행한 정책이 결포징수를 위한 과세대장의 폐기였다.

문제가 많았던 광해군을 치켜세운 것은 일제시기 조선사편수회의 간사로 있던 이나바 이와키치였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을 명분론에 사로잡혀 지체된 국가, 그래서 자율이 아닌 타율성이 관철되는 국가로 그렸다. 이 두가지에 딱 만나는 지점에 광해군이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와 함께 식민사관의 사대주의론이 완성된다.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타율성론-사대주의론-실리외교론은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나바의 광해군 이해를 '만선사관'이라고 차치하는 것으로는 전혀 극복될 수 없다. 더욱이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다는 식의 광해군에 대한 적당한 절충적 평가로는 극복되지 않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광해군 띄우기는 결국 외부의 침략은 조선의 잘못 때문이라는 프레임으로 귀결된다. 조선의 망국과 함께 조선 내부의 뿌리 깊은 사대주의, 당쟁으로 대표되는 정치질, 도저히 개혁할 수 없는 부패가 담론으로 자동적으로 등장한다. 광해군을 칭송하기 이전에 대북파 소수만 제외하고 대다수가 인조반정을 찬성했던 이유를 보아야한다.

백여년에 걸친 대동법의 시행만 보더라도 조선 경세가들의 내공이 절대 만만히 볼 그런 수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곡물인 조(租), 노동력제공인 용(用), 지역 특산물인 조(調)가 조선의 세금이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특산물인 조(調)였다. 원래는 각 지역의 특산물이었지만 시간과 환경이 변함에 따라 특산물의 종류와 수량을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문제를 중간에서 해결해주는 이가 특산물전문 대납업체인 방납이었다. 방납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배에서 때로는 수십배의 가격을 매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세금이 조(租), 조(調)로 되어 있던 것을 쌀로 일원화하는 것이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많은 땅을 가진 양반지주들의 부담이 매우 커지는 반면 가난한 농민들, 소작농들은 부담이 적어지는 설계였다. 그러나 방납의 뒤에는 정치적 실세들이 틀어앉아 있었다. 저자의 설명이다. "연산군 이래 진상은 물론 방납으로 가장 큰 이익을 챙기는 집단이 바로 왕실이었다. 그리고 공물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도 바로 왕실이었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왕실 스스로가 자신의 이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율곡의 제안으로 시작된 대동법은 이원익, 김육 등을 거쳐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안착되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대동법에 대한 정조의 평가다. "시골 백성들은 힘을 펼 수 있고, 도시 사람들은 생활이 윤택해지고, 수령들은 자신의 청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공억(예산집행)에 가닥이 잡히고, 또 장사꾼들은 사고팔 길이 생기며, 배와 수레는 품팔이할 길이 있어, 상하 내외 어디로 보나 고루 공평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동이라는 이름이 헛이름이 아니었다." 부동산 거품으로 서민들이 피눈물을 흘려도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한국의 관료나 수만명이 매년 총으로 살해당하면서도 전미총기협회의 로비로 총기규제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미국 지배 엘리트들은 조선 경세가들의 집요한 정책의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 엘리트의 집요한 개혁의지를 뒷받침한 것이 성리학이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는 이익집단이 정부를 자신의 이익관철의 도구로 포섭해버린다는 '포획이론'을 주장했다. 개혁세력이 사익추구 기득권집단의 포획을 돌파해내는 경우란 거의 없다. 계몽주의로 무장한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예외적인 혁명기나 가능했다. 진보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이 푸틴의 올리가르히 해체, 중국 공산당의 금융자본통제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다. 그만큼 근본적 개혁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은 끊임없는 토론과 행정을 통해 불가능한 개혁을 완수해낸 저력있는 국가였다.

일본에 과도하게 우호적인 지식인들은 항상 조선왕조를 경멸한다. 조선이 형편없는 나라여야만 조선을 망하게한 일본의 행위가 정당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학자 오항녕의 책은 조선을 미워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로부터 조선을 구해내는 좋은 책이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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