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는 세상에 위안을 줍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 나눔] 수선화 시인 정호승

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와 젊은 날의 정호승 시인. ⓒ푸르메재단

서가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1982년 출간된 정호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 입니다. 누렇게 바랜 표지 안쪽에 '목마른 시절 1985년 5월 29일'이라고 쓴 제 메모가 나왔습니다.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혹독한 20대였지만 정호승 시인의 시에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책 표지를 넘기니 금테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세상을 쏘아보는 청년이 있습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부드러운 말씨의 선생님이 이럴 때도 있었구나.'

20대의 정호승을 보고 있자니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탐독한 그녀의 소설책 안쪽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손으로 턱을 받친 사진이 늘 실려있었습니다. 젊지도 늙지도 않고, 웃거나 화내지 않은 무심한 표정이었습니다. 1976년 크리스티가 86세로 타계했을 때 <선데이 타임스>는 그녀가 마흔 살 때 찍은 그 사진만을 사용하도록 부탁했다고 보도했습니다. 70대 정호승 시인도 세상을 쏘아보는 듯한 20대의 사진만을 고집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수선화에게'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같은 서정적인 시는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시집 <서울의 예수>에 들어 있는 시들은 젊은 날의 정호승처럼 시대적인 상황이 반영돼 어둡고 뾰족합니다. 시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가고파

봄날에 죽은 나라 눈물의 나라

봄눈이 오기 전에 산마루 돌아

강 건너 소주 취해 죽은 봄 나라

백일홍 지면 천일홍 피지

쑥부쟁이 피는 나라 팔려간 나라

밀짚꽃 피는 나라 사막의 나라

정호승 시인은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한 이후 2022년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20권의 시집과 <참새>, <산산조각>,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등 동시와 동화, 우화, 산문집 20여 권을 펴냈습니다.

▲ 가족과 함께한 어린 날의 정호승 시인(앞줄 왼쪽). ⓒ푸르메재단

가난한 학창 시절, 마음속 힘이 된 문학

6·25전쟁이 터진 해인 1950년 1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정호승 시인은 일찌감치 대구로 나왔습니다. 은행원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식구들은 가난에 떨어야 했습니다. 집에선 닭을 키웠고 소년 정호승은 매번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했습니다. 고교 졸업 때는 졸업비를 못 내 앨범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가난은 그의 일상이 됐습니다.

그 시기 위안이 된 것이 문학입니다. 그는 단칸방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경희대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2학년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 되자 자원입대했습니다. 1972년 야전공병단 복무 중 응모한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듬해 대한일보에 시 '첨성대' 가, 1982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면서 그는 소설가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샘터>와 <여성동아>, <월간조선> 기자로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뒤 1991년 소설을 쓰기 위해 회사를 나왔습니다. 전업작가가 된다는 건 큰 모험이었습니다.

▲ 경희대 입학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푸르메재단

'누구에게나 벽이 있듯 시인 정호승에게 소설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라는 글귀를 읽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정호승 시인을 뵈었을 때 혹시 올해 소설을 쓸 계획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젊은 시절 소설이 그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7년 동안 소설 쓰기에 몰두해 봤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인 40대를 허비했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이 저에게는 맞지 않고 시적 기질이 맞는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요. 소설에 대한 아쉬움을 산문집이나 우화소설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에게 당신의 시가 노래로 불리는 것의 감회를 물었습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네요. 가수 송창식 씨가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 구절이 좋아서 노래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정주 시인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막상 만난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당신처럼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내 시를 불러준다면 환영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고 하네요. 저의 시도 사랑받는 노래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행복한 일이지요."

정호승 시인의 '이별 노래'는 1984년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동원에 의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97년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김광석의 사후에 널리 불리면서 퍼졌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노래로 저항했던 민중가수 안치환도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강변역에서', '풍경 달다', '고래를 위하여', '희망을 만드는 사람' 등 그의 시 90여 편이 안치환과 여러 작곡가에 의해 노래가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1993년 한 출판사가 독자들을 위한 캠프를 설악산에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안치환은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불렀고 그 자리에 초대된 정호승 시인은 감동했습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이때부터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시인의 마음이 있다

보통 글 쓰는 것이 직업인 작가, 기자, 학자 중에는 원고지 20~30장을 한 시간 안에 쓸 정도로 속필인 사람이 있고 원고지 한 장을 놓고 며칠 동안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르는 비록 다르지만 작곡가 슈베르트는 영감이 떠오르면 미친 듯이 써 내려가 순식간에 곡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노래로 작곡하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하네요. 반면 베토벤은 '전원 교향곡'과 '운명 교향곡'을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어떨까요? "저는 보통 초고를 쓰면 30번 정도 다듬는 스타일입니다. 어떤 시는 10년 걸려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원고지에 고치다 보면 더 이상 고쳐 쓸 여백이 없어서 아예 A4용지에 출력한 뒤 기회가 날 때마다 수정하곤 합니다."

▲ 푸르메재단을 찾아 시집에 사인하는 정호승 시인. ⓒ푸르메재단

정호승 시인에게 시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시를 써서 큰돈을 벌 수도 없고 명예나 권력을 좇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는 위안을 줍니다. 시를 쓰다 보면 제 스스로 위안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시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어린이와 같이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시입니다. 제가 쓴 시 '술 한잔'의 내용 중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쓰면서 저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인생이 때론 냉정하다 못해 냉혹할지라도 원망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원망할 대상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울까요. 생각을 바꾸었더니 인생이 그동안 나에게 많은 술을 사준 셈이 된 거지요."

정호승 시인은 부모님 살아생전 그분들의 아파트를 작업실로 삼았습니다. 매일 아침 부모님 댁으로 출근해 저녁이 되면 퇴근하곤 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매일 출근하는 자식을 보고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당신 역시 글도 쓰고 부모님을 뵙는 것이 적지 않은 기쁨이었습니다.

▲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후 아버지, 동생과 찍은 기념사진. ⓒ푸르메재단

어느 날 아버지가 식탁에 놓인 나팔꽃 씨를 태연하게 입에 털어 넣으셨습니다. 정호승 시인이 화들짝 놀라 말리자 '환약인 줄 알고 먹었다'며 환하게 아버지가 웃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한 송이 나팔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노인이 되면 누구나 장애인이 되는 것이지요. 절망적으로 보이는 장애도 관점을 바꾸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노환으로 시력을 잃은 아버지와 이를 시로 쓴 아들의 이야기가 <나팔꽃>에 담겨 있습니다.

나팔꽃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푸르메재단에서는 설립 초기 죽을 듯 고통스러웠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의 추억을 각계 인사들에게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혜자, 안성기, 장영희, 김창완, 엄홍길, 원택스님, 홍세화 등 정말 많은 분이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원고들이 모여 2008년 <네가 있어 다행이야>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또 이것이 계기가 돼 소중한 인연들이 맺어졌습니다. 엄홍길 대장은 재단 홍보대사, 원택스님은 재단 이사, 그리고 정호승 시인은 열혈후원자가 됐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매번 재단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백두산으로 떠난 여행에는 발달장애 초등학생과 단짝이 되어 3박4일 동안 함께 생활했습니다. 아이가 같은 내용을 계속 물으면 화가 날 만도 한데 정호승 시인이 웃는 표정으로 수백 번 대답해 주는 모습을 보고 여행을 함께한 사람들이 감동받았습니다. 백두산 정상과 북한 병사가 보이는 판문점 앞에서 평화를 기원하며 당신의 시 <백두산>을 낭독했습니다.

▲ '푸르메를 사랑한 작가 초대전'에서. ⓒ푸르메재단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2016년 '푸르메를 사랑한 작가 초대전'입니다. 국내 최초의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개원 행사로 박완서, 정호승, 이해인 세 분의 원고와 애장품 등을 전시했습니다. 푸르메재단에 인세를 보내주시고 아낌없이 사랑해주신 세 분을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장애어린이와 그 부모를 위한 시낭송회도 열어 눈물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책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 사무실에 오셔서 수북이 쌓인 당신의 시집에 정성스럽게 사인해 줍니다. 시인의 얼굴이 나팔꽃처럼, 때론 수선화처럼 환합니다. 가끔 정호승 시인을 뵐 수 있는 것은 인생의 큰 행운입니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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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메재단

지난 2005년 설립된 푸르메재단은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비영리단체다. 2016년 서울 마포구에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 장애어린이의 치료와 재활을 돕고 있다. 현재는 어린이재활병원에 이은 2기 사업으로, 학업과 재활치료를 잘 마치고도 일자리가 없어 고통받는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한 일터 ‘푸르메소셜팜’을 완공해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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