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는 혼자 행동하지 않는다"…907 '기후정의행진'에 함께하는 이유

[홍명교 칼럼] 기후위기 대응, 정치운동이자 국제적 체제 변화 운동으로 발전해야

낯설지 않지만, 지루한 이야기

지난 8월, 몇 차례에 걸쳐 동료들과 함께 합정역사 안에서 퇴근길 시민들에게 9월 7일 강남역에서 열리는 기후정의행진 참가를 호소하는 작은 홍보물을 배포했다. 우리만의 행진, 원래부터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만의 행사를 넘어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길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가만히 서서 퇴근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다양한 색깔로 이뤄져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기둥에 기대 30분이 넘도록 친구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 빠른 걸음으로 귀가하는 사람,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상암동으로 향하는 사람, 낡은 수레를 끌고 지하철 차량 내에서 싸구려 물건을 파는 할머니, 맛집에서의 데이트로 향하는 청소년, 기후정의행진 홍보물을 흔하디흔한 가게 전단지처럼 취급하는 사람….

이런 다양성 속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른 어느 이슈에서보다 사람들이 홍보물을 잘 받아가고, 또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여름은 정말 너무 더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으로는 더 더워진다고 합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맞서기 위해 9월 7일 기후정의행진이 열립니다!"라고 외쳤을 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간혹 어떤 시민들은 "꼭 갈게요!"라고 말해주거나, 가던 길을 굳이 돌아와 홍보물을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이 작지만 강한 관심이 담긴 반응들 속에 어떤 균열이 있으리라.

'기후위기'는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메이저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후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폭염이나 폭설, 폭우, 산불, 해수면 상승과 엘니뇨,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의 융해로 인한 생태 위기 등 전 세계적 기후변화에 대한 적신호가 뉴스 화면을 연일 장식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으레 같은 서사가 반복됐을 때 설령 그 서사가 재앙적인 상황을 예고하고 있을지라도 완전히 그 상황에 적응해버리고 사유를 멈춰버리기도 한다. 재앙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익숙해진 소비 패턴과 완벽하게 빈틈없이 매워져 있는 듯한 글로벌 착취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실천들은 정말 효과적인가?

그러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다. 한여름 찌는 듯한 날씨 때문에 에어컨을 켤 때, 혹은 바깥 기온과 차이가 큰 나머지 몸이 으슬으슬해질 때, 폭염 속 노동에 쓰러져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소식을 전해들을 때, 불편은 괴로움 혹은 죄책감으로 전이된다. 어떡해야 할까? 기후위기를 진정으로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실천이라도 동참하려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쓰레기를 줄이려는 작은 노력들,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분리수거 등 일상 속 캠페인이 지속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질문들이 끊임없이 머리 속을 맴돈다. 이런 노력들이 모두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늘어나는 탄소 배출을 감추는 면피성 효과에 그칠 뿐이라면?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각종 '대책들'이 하나같이 낡은 탄소 거래 시스템을 유지한 채 이뤄지는 거짓말들에 지나지 않는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 '모든 게 탐욕스러운 인간 때문'이라는 질타가 사실은 책임 떠넘기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소비패턴을 바꾸기 위한 노력, 쓰레기 줄이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그런 실천에 미약하나마 참여하는 이유는 일상에서 그런 실천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소비로 가득한 삶이 야기하는 어떤 파괴들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준다는 점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작은 실천들이 우리들의 자기만족이나 죄책감 덜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는 "기계와 경영관리 수단들을 통한 화석연료의 대규모 활용을 이상화하는 기술정치 체제"(탄소기술관료주의) 하에서 발전해왔고, 이는 기후와 생태를 파괴시켜왔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착취했으며, 국가권력에 의한 사회 통제 역량을 강화하기도 했다. 즉 생산성 증진에 대한 오늘날의 모든 정치경제적 신화는 기후위기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우리는 더 정치적이어야 하고, 억압받고 착취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 모순을 봐야 한다.

재앙을 팔아넘기는 위선

21세기 이래 글로벌 북반구의 주요국들은 탄소 배출을 절감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왔고, 이는 한국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노력의 결과 유럽연합은 1990년 56억 톤이었던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이 2018년 42억 톤으로 감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중국·일본·영국·한국 역시 수십년 내에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 역시 '지속가능성'과 'ESG'라는 장밋빛 전망을 신화화하고 있다. 포스코 같은 대표적인 기후악당 기업들이 ESG를 장식삼아 자신들이 마치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마냥 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런 기만에 속아 넘어가주는 우리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심지어 탄소 시스템 하에서 이윤 증식을 이어가고 있는 에너지 기업들이 '친환경'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내놓는 비즈니스들을 떠올려보라. '친환경 석유'와 '친환경 탄약'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전되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풍경이다.

우리의 작은 실천들은 세계적이고 정치적이며, 거시경제적 난제들과 무관하지 않다. 로리 파슨스(Laurie Parsons)의 저작 <재앙의 지리학>(원제: Carbon Colonialism, 오월의봄)은 냉정하게도 앞서 언급한 작은 노력들로 기후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전제하며, 글로벌 공급망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앙의 지리학>. 로리 파슨스 지음, 추선영 옮김.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무엇보다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는 기후붕괴의 현장을 감춘다. 가령 벽돌이나 옷은 더 이상 하나의 국가에서 생산되지 않으며, 다양한 공장과 국가를 거쳐 가공된 후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이런 식의 생산은 비용을 낮추고 효율성을 높이지만 공급망의 실체를 희미하게 만든다.

글로벌 생산의 세계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진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래 선진국들에서 일어난 많은 변화들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반구 선진국들은 '제조강국'으로서 자국 시장에 팔 티셔츠나 냉장고 같은 상품을 직접 만들었다. 이제 북반구 선진국 소비자들이 자기 일상에서 소모하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이자 탄소배출 국가로 거듭난 이유는 전 세계의 유명브랜드들이 임금이 저렴한 머나먼 땅에 하청공장을 세우고, 글로벌한 착취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옷만 해도 온전히 하나의 국가에서 생산되는 경우는 없다. 우리가 입는 많은 옷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인종주의적이고 착취적인 면화 재배 강제노동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원자재는 임금이 매우 저렴하고 노동조건이 끔찍하기로 소문난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면직물 의류 공장으로 옮겨진다. 가령 캄보디아에서 사용되는 면화의 총 86.4%는 직간접적으로 중국에서 들어오는데, 이는 다시 거대한 상선에 실려 유명 브랜드 라벨을 달고 선진국으로 판매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완성품이 만들어진 국가를 라벨에 적힌 아주 작은 글씨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완제품이 만들어지기 까지 얼마나 많은 국가의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면직물 원단이 캄보디아, 베트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의 공장에 도착할 때까지 평균 1만4000킬로미터를 이동하고, 완제품이 다시 서울에 오려면 수천 킬로미터를 와야 한다. 이런 운송 과정에서 이미 적지 않은 탄소를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에서 대다수 상품들은 이렇게 측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어떤 상품에 들어가는 여러 원자재들은 제각각 다른 국가에서 옮겨오고, 그것은 또 다른 국가에서 채굴된 것일 수 있다. 공급망의 복잡성과 모호성은 비윤리적인 모순들을 낳을 뿐만 아니라, 탄소 비용 측정마저 어렵게 한다. 이 과정에서 야기되는 막대한 수준의 탄소배출을 해결하지 않으면 기후위기 해결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재앙의 지리학>은 우리에게 덧씌워진 환상이 왜 잘못됐는지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현재의 글로벌 공급망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유포되는 기만을 폭로한다. 나아가 오늘날 글로벌 북반구의 주요 국가들이 내세우는 계획들이 탄소 배출이라는 지구적 문제를 개별 국가 이슈로만 제시함으로써, 문제 해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배출되는 탄소만을 기준으로 삼는 '낡은' 탄소 회계 메커니즘 하에서는 글로벌 기후붕괴 시대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끈질기게 기업이나 각국 정부에 의해 공표된 '녹색 약속'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기후위기는 동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후재앙의 시대에 인간이 경험하는 기후위기는 결코 동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저자가 캄보디아 벽돌 가마와 의류 하청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도시빈민의 시선에서 글로벌 공급망과 탄소 식민주의의 그늘을 직시할 때다.

캄보디아가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을 받아들이자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시장에 넘겨주게 됐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여지없이 파괴됐다. 재앙은 북반부보다는 남반구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몰려오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글로벌 하청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가혹하다. 로리 파슨스가 말했듯 "기후는 절대로 혼자서 행동하지 않"는다. 기후는 "사회라는 옷을 입고 인간을 만난"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면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된다. 우리 모두가 기후위기를 동일하게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떙볕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 거리에서 하루를 보내야 간신히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만큼의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영세 상인 등과 온종일 에어컨을 쐬며 일할 수 있고, 단 1분도 바깥에 나가지 않고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상류층 사람들이 체감하는 기후위기나 더위는 완전히 다르다. 후자에게 폭염은 잠깐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체험이지만, 전자에게 폭염은 재앙 그 자체다.

재작년 수해 참사가 발생했을 때 어떤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떠올려보자. 죽은 이들과 피해를 입은 이들은 하나같이 반지하층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평범한 노동자들과 장애인, 시민들이었고, 대통령실이나 서울시장은 잠시 생색내는 듯하다가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퇴근 후 몸을 뉘일 수 있는 안정적이고 안전한 주거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 놓인 이들에게 기후위기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재난'이다.

9월 7일, 기후정의행진에 함께 해야 하는 이유

오는 9월 7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역 일대에서 '기후정의행진'이 열린다. 재작년과 작년 9월 말 열렸던 기후정의행진에는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후위기 최전선에 서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체제를 전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번에는 강남역이다. 강남은 대한민국 기술관료주의적인 화석연료 체계 하 온갖 자본이 모여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포스코나 현대, 삼성 등 초국적 기후악당 기업들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남역 대로에서의 행진은 이 위기가 결코 동등하게 다가오고 있지 않음을 폭로하고, 작금의 주류적인 대책들이 한낱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이 자리에 근심어린 시선으로 기후위기를 걱정하고, 점차 파괴되고 있는 일상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거 참가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 이번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에 비례 위성정당에 속했던 정치세력들이 참가한다는 이유를 들어 '행진 불참'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위성정당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진의에는 공감하지만, 운동의 기각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 빈번하게 위성정당을 비판했던 장본인으로서 말하자면, 잘못된 선택을 했던 정치 그룹의 오류를 비판하고 정정하기 위한 모든 과정은 오직 광범위한 운동의 장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제도정치판에서 흔하디흔한 경향적 오류는 (보이콧이나 캔슬컬쳐가 아니라) 대중운동의 우위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는 그 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 힘을 모아야 한다. 운동이 확대되지 않는다면, 위성정당 비판의 '조직적인 목소리' 역시 모이기 어렵다.

기후정의행진의 지향과 정치적 의의는 여전히 중요하며, 가야 할 길은 멀다. 우리는 탈정치화되거나 시장화(탄소거래제, 각종 '친환경' 수식이 덧붙은 탄소 상품들의 탄생)된 가짜 기후위기 대응에 맞서 자본에 의한 글로벌 공급망과 착취에 도전해야 한다. 하루의 행진이 이를 해결하는 종착지는 아니지만, 이런 목소리를 확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거점이 될 수는 있다.

'907 기후정의행진'에 주변 사람들과 함께 적극 참여해 자꾸만 정치 바깥, 경제 바깥,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비판 바깥에 머무르려 하는 경향을 극복하자. 그리고 이렇게 모아진 힘을 다시 동네와 일터, 해외로 나누어 보다 다양한 운동과 국제연대의 구축으로 연결시키자. 그것이 방글라데시 의류하청 공장 노동자들의 외침, 캄보디아 벽돌 공장 노동자들의 땀, 신장위구르자치구 면화 재배 노동자들의 눈물과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는 각국 정부와 자본을 압박하는 막강한 기후정의 네트워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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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사회운동이 마주한 곤경을 실천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플랫폼C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동아시아 사회운동과 교류·연대하고 있고,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 함께 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와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역서로는 <고양이 행성의 기록>,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공동역서로 <아이폰을 위해 죽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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