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최근 폭우로 압록강 범람의 수해를 입은 북한에 물자 지원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남북 간 통신선도 없이 남북관계가 사실상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북한이 어떤 반응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1일 박종술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은 서울 종로구 도렴동 정부서울청사에서 "최근 신의주 등 평안북도와 자강도를 비롯한 북한 지역에 내린 집중호우로 인해 북한 주민들에게 많은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북한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
박 사무총장은 "우리측은 북한 주민들이 처한 인도적 어려움에 대해 인도주의와 동포애의 견지에서 북한의 이재민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자들을 신속히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며 "지원 품목, 규모, 지원 방식 등에 대해서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와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속한 호응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제안에서 국제기구나 민간 차원이 아닌 남북협력기금을 통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날 기자들과 만난 통일부 당국자는 이번 지원 제안 결정에 대해 "적십자사와 정부가 공동으로 협의했고 예산은 남북협력기금으로 집행된다"고 밝혔다.
정부가 국제기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예산을 사용해 인도적 지원을 추진하려는 것은 2018년 이후 처음이다. 국가통계인 '인도적 대북지원 현황 총괄'에 따르면 2011년부터 올해까지 산림병충해를 막기 위한 2018년의 12억 원 지원을 제외하고 정부의 직접 지원은 없었다.
대북 지원에 대한 국내 여론이나 물품 전용 가능성 및 이후 모니터링 등을 고려했을 때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이 정부의 직접 지원보다 수월한데도 이번에 직접 지원 방식을 제안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통상적으로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은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과거 수해 지원 같은 경우는 긴급 구호 성격이기 때문에 직접 지원을 많이 해왔다"고 밝혔다.
지원 품목에 대해 이 당국자는 "이재민들에게 긴급한 물자를 중심으로 우선 검토할 예정이다. 품목 등 구체적 사항은 북한과 협의할 것"이라며 "긴급한 상황이라 식량과 의약품 등이 우선적으로 고려된다"고 답했다.
정부가 수해 지원을 마지막으로 제의한 것은 2012년이다. 당시 북한은 정부의 제의를 거부했는데, 올해 직접적 수해 지원 제안을 결정한 배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올해 피해 규모가 상당하다고 추정되고 여러 상황을 고려했다"고 답했다.
앞서 지난달 27일 폭우 발생으로 압록강이 범람하면서 인근 지역이 적잖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달 31일 <조선중앙통신>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의주군에서폭우로 4100여 세대와 농경지 3천 정보를 비롯해 공공건물과 시설물, 도로, 철길이 침수됐다고 보도했다.
인명피해도 상당 부분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소집한 정치국 비상확대회의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구체적 피해 규모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통신이 이날 고립위기에 처한 주민 5000명 중 공군 비행기 등을 통해 약 4200명의 주민을 구조했다고 밝힌 바 있어 8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인원에 대해서는 공군 비행기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구조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명피해 규모를 예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이 적잖은 피해를 입었으나 정부의 제안을 수락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 및 그해 10월 있었던 실무접촉 이후 북한은 사실상 남한 및 미국과 대화를 중단하고 있다. 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통신을 끊은 남북이 대북 전단과 오물 풍선을 상대에게 보내는 등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만 1일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이 구호 물자를 지원하는 방안을 북한과 논의하고 있다고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이 보도하기도 해 지원 수용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롤랜드 쿱카 유니세프 북한 임시 대표는 '북한이 신의주 일대에 발생한 수해로 지원을 요청했느냐'는 방송의 질문에 장마철을 대비해 식수, 위생·보건 물자를 사전 배치했고 이에 대한 사용 논의를 북한 당국과 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북한 당국이 요청하면 이 물자를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남북 양측은 지난 70여 년 간 상대 지역이 수해를 입을 경우 물자 지원을 제안해 왔는데, 수해 지원이 막혔던 남북관계를 해소하는 역할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아웅산 테러가 일어난 이후인 1984년 8월 서울 경기 지역에 집중 호우가 내리면서 홍수가 발생하자 북한은 방송을 통해 물자 지원을 제의했었다. 남한의 이범석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다수의 외교관이 사망하면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킨 사건이 있었음에도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제의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등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처럼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연계돼 진행돼왔다. 6.25 전쟁 직후인 1956년 남한에 폭우가 내리자 북한의 조선적십자사는 이재민들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대한적십자사 앞으로 보냈으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995년에는 북한에 홍수가 나면서 이번에는 남한이 북한에 지원을 제안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과 김영삼 정부의 강경한 대북 정책이 겹치면서 북한은 처음에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해 5월 일본에 쌀 공급을 요청하며 사실상 남한의 지원을 받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했다.
이후에 김대중 대통령 집권 이후 남북관계가 해빙기를 맞으면서 2000년대 이후 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남한의 대북 수해 지원이 이뤄졌다. 통일부에 따르면 2005년 구호물품 19만 달러(약 2억 원), 2006년 쌀과 구호물품 및 자재 장비 등 8003만 달러(약 800억 원), 2007년 구호물품과 자재 장비 4452만 달러(423억 원), 2010년 쌀과 컵라면, 시멘트 등 634만 달러(72억 원)의 지원이 진행됐다.
북한의 예상 반응에 대해 이 당국자는 "상황을 예단하지 않겠다. 우리 측 제의에 호응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정부가 이번 제안을 내놓은 의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당국자는 "인도적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언제든지 지원에 열려있다는 입장을 그동안 지속적으로 표명해 왔다"며 "북한의 공식 발표를 보면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는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 측과) 대면 협의, 서면 협의, 제3국 협의 등 모든 협의 방식에 열려있다. 재외공관에서의 연락도 가능하다"라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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