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고객센터, 드라마틱한 반전은 가능하다

[해를 넘긴 건강보험 고객센터 사태, 이래야 풀린다] ②

'소속기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의 파업과 농성이 해를 넘겨 지속되고 있다. 지난 2021년 '소속기관 설립과 고용전환'을 골자로 한 사회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공단의 '경쟁 채용' 주장과 노조의 '전원 고용승계' 요구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110일을 훌쩍 넘긴 건보고객센터지부 싸움의 요구와 이유는 무엇인지, 노조와 시민사회단체가 보내온 세 편의 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제작발표회부터 온 세상이 들썩했다. 이전까지 단역으로 홀대받았던 소속사 '공공'의 무명 배우들이 주연급으로 전격 발탁됐기 때문이다. 캐스팅도 파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흥행에 연연하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감독(문재인)의 포부에 많은 기대와 찬사가 쏟아졌다. 그런데 본편이 시작되자마자 주연 배우들의 자격을 따져 묻는 항의가 갑작스레 빗발쳤다. "무분별한 주연 발탁을 반대한다"는 기존 메이저급 배우들의 거센 반발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윽고 제작진(정부)도 예고와는 사뭇 다른 내용으로 드라마를 전개해 나갔다. 연기 인생 5년, 10년 만에 난생 처음 주연을 맡는 줄로만 알았던 '공공' 소속 비정규직 단역 배우들은 제작진의 하차 압박에 못 이겨 역할을 축소(자회사)하는 데 끝내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드라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는 산으로 갔다. 극적인 반전도, 잔잔한 감동도 없는 이 드라마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한 줄 평은 다음과 같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우애와 온기가 넘치는 감동 드라마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막장 드라마(취업사기극)였기 때문이다. 더더욱 황당한 건 애초 출연진에 이름을 올렸던 작중 인물 중에는 '시즌1'이 끝나고 새로운 감독이 연출하는 '시즌2'가 진행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얼굴 한 번 화면에 비추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다.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노동자들이다.

▲ 2월 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건강보험고객센터상담사 정규직 전환 촉구 오체투지 행진' 출발에 앞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산으로 간 공공부문 정규직전환 정책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06년부터 고객센터 상담업무를 민간 용역업체로 외주화해 운영해 왔다. 당시 공단은 “공공기관 최초로 '전문' 상담기관을 출범”한다며 이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민간 용역업체들은 인력공급과 노무관리만 도맡아 수행할 뿐, 건강보험 상담업무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나 역량은 전혀 갖추지 못했다. 실제 상담업무를 위한 장소(사무공간)와 장비, 시설 등 제반 시스템 및 인프라는 전부 공단이 제공하고 있었다. 결국 공단이 직접 수행해야 할 업무를 오로지 '실적 올리기'에만 급급한 민간 용역업체에 내맡긴 격이다. 이들 민간 용역업체들은 상담노동자들의 응대 콜 수를 기준으로 상담실적을 평가해 왔는데, 이처럼 '더 많은 콜 수'가 곧 생산성의 지표가 되다 보니 고객 응대에 시간을 충분히 쓸 리 만무했다. 건강보험 가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안내하고 각종 민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상담노동자들의 고유한 역할일진대, 상담시간이 '3분'만 초과해도 통화 종료를 재촉하는 관리자의 쪽지부터 메신저로 날아들었다.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가 제 역할을 하려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콜 수 경쟁에만 사로잡힌 민간위탁 운영체제를 하루빨리 청산해야만 했다.

하지만 1600명에 달하는 공공기관 최대규모의 콜센터 업무를 정규직화하기 위한 논의는 시작 단계부터 삐걱거렸다. 앞서 '메이저급 배우'로 빗대 표현한 공단 정규직 노동자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공단도 이에 편승해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격 검증' 빌미로 고용안정 위협하는 공단

건강보험공단 상담노동자들은 가입자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서는 상시지속적인 상담업무의 직영화가 필요하다고 줄곧 이야기해 왔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공단은 2021년 10월 외부전문가가 포함된 '민간위탁사무논의협의회'에서 고객센터 업무수행방식을 소속기관으로 전환하는 데 합의했다. 소속기관 전환은 문재인 정부가 선공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 원작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소한 상담노동자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보장하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각본의 수정이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취지에 입각해 드라마는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공단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상담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방치할 뿐이었다. 사무논의협의회에서 소속기관 전환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된 지 2년이 다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던 공단은 작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재직 중인 상담노동자들에게 입사년도에 따라 채용시험 절차를 거치라는 이행안을 내놓았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회적 합의 이행을 사실상 거부해 온 공단이 이제 와서 내놓은 것은 결국 비정규직 상담노동자에 대한 선별 채용, 곧 해고를 전제한 전환 계획 발표였다.

정부와 공단은 약속을 지켜라

시즌1이 허무하게 종영되고 시즌2도 어느덧 3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시즌2는 원작의 핵심 요소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춰 이제 '비정규직'의 '비'자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전작이 산으로 갔다면, 시즌2 들어서는 아예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전작에서 계승한 것이 하나 있다면 '공정성 논란'뿐이다. 이 논란의 핵심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소속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공정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험은 자격을 검증하는 유일한 관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미 상담노동자들은 다년간 현장에서 익힌 경험과 숙련을 통해 매일 120콜, 많게는 200콜이 넘는 상담업무를 담당해 왔다. 고객센터에서 제공하는 1천여 개의 상담업무를 상담노동자들은 민간 용역업체의 극단적인 감시와 통제를 감내하며 수행해 냈다. 반면 민간 용역업체들은 상담노동자들을 그저 '전화 받는 기계' 취급하며 쥐어짜는 기술에만 통달했다. 일선에서 공단과 가입자를 연결하는 전문성과 책임감은 다름 아닌 상담노동자들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자격을 물어야 할 대상은 여태껏 건강보험의 공공성 강화에 대해 끔찍할 만큼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공단과 민간 용역업체가 돼야 하지 않을까?

반전도, 감동도 없는 '공정' 드라마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정부와 공단은 상담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 그리고 공공기관의 공공성을 위한 소속기관 전환 약속을 더 이상 미루고 뒤틀지 말아야 한다. 2021년 어렵사리 맺은 사회적 합의 취지에 맞게 '해고 없는 소속기관 전환'을 조속히 이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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