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글은 누구나의 손안에 있다

[기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 문ᄍᆞᆼ와로 서르 사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ᆞㅣ"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므로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쉽게 익혀 널리 쓰이기 바랐던 한글은 그러나 세종대왕의 바람처럼 널리 쓰이지 못했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을 필두로 하여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양반 식자층이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나, 백성들이 글을 갖게 되면 지배층이 누렸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러한 이유로 한글을 부녀자나 상민들이나 쓰는 글이라며 ‘언문’, ‘암클’, ‘중글’ 등으로 낮추어 부르며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던 때가 있었으나, 50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른 오늘날 한글은 전 세계인이 배우는 글자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째서 한글이 양반 식자층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은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문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할 수 없었던 저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지나왔는데도 말이다. 좁은 소견이긴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표현의 욕구'에서 찾는다.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생각을 '퍼 나르는' 그릇이기도 하다. 글은 나의 생각이 타인의 생각과 부딪혀 공명하게 한다. 글을 쓰고 읽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글이 굳이 거창한 사상을 담은 고담준론일 필요는 없다. 그 옛날 멸시받던 한글을 지켜낸 것은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또는 '보고 싶습니다' 같은 여인들의 편지글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시키는 것은 글이 가진 아주 기본적인 기능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류사가 이토록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글의 힘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통한 계몽은 지배층의 기반을 공고하게 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 평화와 정의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곧 권리의 신장인 동시에 각자가 가진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엄혹한 시대일수록 명문(名文)이 많이 나온다. 외부로부터 자유를 구속받을 때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여 유무형의 폭력에 짓눌려 있을 때 한 줄의 문장은 그에 저항하는 집단행동을 형성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지금껏 시대를 이끈, 혹은 변혁해온 명문장들은 그 글을 쓴 사람이 특별히 훌륭해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억압을 탐지하는 감각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누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감각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노력에 의해 고양되기도 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둔재를 미리 탓할 필요가 없다.

내면의 탐색을 통한 자기 이해에서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지향까지, 글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기 때문이 아니다. 글쓰기에 있어 그런 식의 접근은 게으르게 느껴진다. 글쓰기에 있어 모든 주제를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글을 쓰는 동안 우리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감각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키워진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글을 우리는 좋은 글이라 말한다. 작가는 한 명 한 명이 각각의 작은 정부이고, 작가는 모두 반동이라는 우스개가 우습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자기가 세운 정부마저 전복하기도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글 창제의 이유는 사람마다 쉽게 익혀 널리 그 뜻을 펼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간에 숱한 시련을 겪었으나 지금 한글은 누구나의 손안에 있다. 그 말인즉슨 누구나 자신의 뜻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뜻을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세련되게, 조금 더 근사하게 펼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오는 4월 <길동무 문학학교>가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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