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에 치여 '이세계'에서 눈뜬 당신의 '정치적 선택'은?

[이세계 민주주의 교실①]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민주주의 가르치기'

당신은 트럭에 치여 이세계(異世界)에서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혼자는 아니다. 수십 명의 지구인과 함께 있다. 조심스레 '상태창'을 외쳐 봤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쳐다보고 웃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수치심만 들었다. 만화나 소설처럼 마법이나 무술, 하다못해 농사기술이라도 뭔가 새롭게 할 수 있게 된 건 없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럼에도 당신, 아니 당신들은 당장 밥도 먹어야 하고 살 곳도 구해야 한다. 직면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것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수렵채집을 해야 하는지, 원주민 마을로 가서 임금노동자가 되어야 하는지, 거처는 동굴을 찾아야 하는지 움집을 지어야 하는지….

무엇이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여럿이 힘을 합쳐도 쉽게 되지는 않는다. 결국 분업과 협동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당신의 의견을 관철할 것인가. 주머니 속의 목캔디와 젤리를 모아 금권정치를? 사냥·농사 능력이 뛰어난 이를 지도자로 추대해 그의 명령에 따를까? 주요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할까, 투표로 할까? 투표를 한다면 투표권은 1인 1표? 아니면 능력에 따른 차등투표? 지도자를 뽑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지도자에게 위임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까지?

흡사 판타지 만화·소설의 도입부 같지만,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민주주의론' 수업에서 매 학기마다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컨셉' 토론이다. 앞 세대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청년들이 제로 베이스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고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수업을 기획했다. 존 롤스(John Rawls)의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일부 차용한 '제로(0)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민주주의'인 셈이다.

정작 우리 지구의 민주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이유는 다르지만, 좌우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다. 빅카인즈 검색 결과, 작년 한 해 '민주주의 위기'를 언급한 기사는 5712건에 이른다. 올해는 그 정도가 더 심해져서, 1월에만 768건의 기사가 확인된다. 물론 최근에만 위기였던 것은 아니다. 1990년 이후 총 7만2300건의 기사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언급해왔다. 우리 정치사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기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우리 주변국의 상황만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유럽과 미주에서도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몇 년전에는 '포스트(post)-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법치국가의 성격도 여전히 가지지만, 선출된 정부가 국민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하려 했던 목적을 배신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포스트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 깊어지고 있다. 과거 "어떤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정치적 투쟁을 펼쳐온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꼭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라고 되묻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하던 시대가 끝난 지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포스트민주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에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가르쳐야 할까? 세계 각국에서 온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론' 수업을 담당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이다.

고민 끝에, 교과서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이론을 가르치는 한편 다음과 같은 기본적 원칙만 두고 민주정체를 만드는 토론, 일종의 사고실험을 진행했다.

1. 강의실에 들어온 순간 여러분은 '이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2. 이곳에서 여러분은 원래의 세상과 다른 페르소나를 설정해도 좋다.

3. 지금부터 우리는 함께 공동의 문제를 결정해나가야 한다.

4. 무작위로 정해진 소규모 그룹의 정체성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5. 각 소규모 그룹에서 1명씩 뽑아 선관위를 구성한다.

6. 선관위를 중심으로 선거 제도를 확정하고 대표자 5인을 선출한다.

7. 대표자 5인을 중심으로 정당을 구성할 수 있으며, 독립적 시민단체도 만들 수 있다.

8. 학기 마지막 수업시간까지, 여러분만의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

(2022~23년 봄·가을학기에서 '민주주의 이론' 수강자들에게 준 실제 토론수업 지침)

수업의 결과는 예상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2022년 연 첫 번째 수업 수강생들의 경우,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정당,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정당, 스머프식 공동체주의를 주장한 정당 등 이념중심적 정당이 주를 이뤘고, 보다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헌법이 만들어졌다.

2023년 수강생들의 경우는 한국인을 더 우선시하겠다는 정당, 엘리트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정당, 자신을 지지하면 쿠키를 나눠 주겠다는 정당 등 이익중심적 정당이 주를 이뤘고 대의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선거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선출된 대표들의 권위를 부정하는 시민 불복종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 학기 동안의 '이세계 경험'을 마친 학생들에게, 현 지구의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관점에서 논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이 특집 연재는 그 결과물이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민주주의'란 어떤 의미일까? 세계의 청년들은 지금의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고민한 세계 청년들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자. (☞연재 ②편부터는 학생들의 글을 송 교수의 소개글과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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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호

송경호 박사는 정치사상 전공자이자 개념사 연구자로,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BK21 '혁신 과학기술 시대의 정치적 문제 해결 교육연구단'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인공지능 빅뱅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인문학자들의 모임인 'AI Five'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인권, 민주주의, 기후위기, 인공지능, 정치(학)의 변화 등을 키워드로, 다양한 연구 및 집필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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