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선제 사용 법제화 북한이 유일하다? 미국과 매우 닮아있다

[정욱식 칼럼] 평화의 재발명(6) : 이분법적 사고 벗어나 '핵 선제 불사용' 국제법 제정 필요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인 집단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57차 중앙통합방위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말이다. 일단 북한이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핵무력을 법제화하고 핵무기 사용 조건을 열거하면서 핵 선제 사용 교리를 포함한 것은 '팩트'이다. 하지만 북한이 '유일하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핵 선제 사용은 핵보유국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적대 세력에게 핵무기를 먼저 사용할 수 있다는 정책을 의미한다. 이와 대칭적인 정책이 '핵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혹은 '유일한 목적(sole purpose)'이다.

이는 핵무기의 임무를 다른 핵보유국의 핵 공격을 억제하고 억제가 실패할 경우 보복을 가하는 것으로 국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적인 핵보유국'이라면 핵의 임무를 여기에 두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 공식적인 핵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국이고, 비공식 핵보유국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 등 4개국으로 총 9개국이다. 공식과 비공식을 나누는 기준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른 것이다. 이 조약에선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의 핵보유는 인정하고 있다.

그럼 9개국 가운데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을 채택해온 나라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무조건적인 선제 불사용 정책을 천명해온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인도는 적대국이 "생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러시아와 파키스탄은 북한과 흡사한 핵 교리를 채택하고 있고, 미국·영국·프랑스는 핵 선제 불사용 정책 채택을 한사코 거부해왔다.

가장 주목할 점은 북한과 미국이 '닮은꼴'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핵무력법에서 5가지 사용 조건을 명시하고 있다. 조건은 아래와 같다.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하였다고 판단되는 경우 △핵 또는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한 경우 △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들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적 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했다고 판단한 경우 △유사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경우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핵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미국의 역대 행정부가 작성한 전략 문서인 '핵태세 검토(NPR)' 보고서에 담긴 것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다만 동맹국에 핵우산(확장 억제)을 펼치고 있는 미국은 자국뿐만 아니라 "동맹과 우방의 사활적인 이익"을 보호해야 할 때에도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혀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대통령의 명령 시 즉각적인 핵 사용이 가능하도록 '경보 즉시 발사'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북한 역시 "경상적인 동원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이 핵무력의 "효과성과 다각화"를 높이기 위해 전술핵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처럼, 미국 역시 "유연성과 다양성"을 증대하기 위해 전술핵이 필요하다고 한다.

비핵국가에 대한 정책도 닮아 있다. 북한은 "적대적인 핵보유국과 야합하여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이나 공격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한 비핵국가들에 대하여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핵무기로 위협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미국의 정책을 복사해서 붙이면서 나라 이름만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같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차이점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북한의 핵정책은 9개의 핵보유국 가운데 가장 투명하게 공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이 핵무력법을 제정하고 그 전문을 만천하에 공개했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 대표적인 개방국가인 미국의 핵정책은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핵태세 검토 보고서 가운데 민감한 내용은 비공개로 한 경우도 많았고, 바이든 행정부는 아예 요약문만 공개했다.

이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핵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북미간의 핵 능력 격차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100배 이상이 난다. 그래서 북한은 핵 억제의 세 요소 가운데 능력(capability)의 부족을 전달(communication)과 신뢰(credibility)를 통해 만회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달과 신뢰는 유사시 핵 사용 의지를 상대에게 전달해 상대로 하여금 그걸 믿게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 윤석열 대통령이 1월 3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57차 중앙통합방위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리하자면, 핵 선제 사용 교리를 채택하고 있는 핵보유국은 북한이 유일한 게 아니다. 공개 여부 및 그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을 제외한 모든 핵보유국들은 사실상 선제 핵 사용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이들 나라는 이게 이성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내가 '선빵'을 날릴 수 있다고 해야 상대가 '선빵'을 못 날릴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게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인류의 생존을 담보로 한 도박에 가깝다. 그래서 핵 시대의 인류 생존법의 출발점은 핵 선제 불사용을 국제법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주장이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것이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핵은 나쁘고 누구의 핵은 좋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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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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