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예정된 전 세계의 주요 외교 일정 가운데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가장 주목을 끌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푸틴은 1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한 최선희 외무상에게 "빠른 시일 내에 (북한을) 방문할 용의"를 표명했다. 아마도 푸틴의 방북은 3월로 예정된 러시아 대선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기만 남은 것으로 보이는 푸틴의 방북이 국제사회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북러관계 밀착이 가져올 지정학적 파장이 상당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9월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을 전후해 수면 위로 올라온 '북러 무기거래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동북아 안보 정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는 북한의 포탄과 미사일 제공으로 혜택을 보고, 북한은 러시아의 첨단무기 개발 지원으로 혜택을 보고 있다며, 북러 관계 심화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한미일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북러 무기거래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를 위반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북러 밀착을 견제하는 데에는 역부족인 현실이다. 오히려 북러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방적인 관계 강화에 나서고 있다.
24년 만에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 푸틴의 방북은 그 백미에 해당될 수 있다. 매우 우려스러운 흐름이다. 동시에 북러관계 밀착의 배경과 원인부터 냉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실효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미국 단극체제의 쓴맛
우선 1990년대 초반 소련 몰락의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냉전 종식이 자신도 지분을 갖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출현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1989년 몰타에서 소련의 미하엘 고르바초프 공산당 총서기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던 미국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1991년 12월에 소련이 해체되자 "냉전은 종식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승리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샴페인을 터트린 미국은 그 이후에 자제의 미덕을 잃었다. 미국이 약속을 깨고 나토 동진을 계속 밀어붙인 것이 이에 해당된다.
KGB 관료로서 이를 목도한 푸틴은 대통령이 되자 소련의 몰락을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사건"으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미국에 철저하게 모욕당했다고 여겼다. 나토의 동진과 미국이 동유럽 국가들에 미사일방어체제(MD)를 전진 배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푸틴은 2007년 뮌헨안보회의에서 "주인이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 강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이런 감정이 강해질수록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를 다극체제로 바꾸겠다는 결의도 강하게 다졌다.
한편 소련 몰락 이후 북한의 최대 목표는 제국의 지위에 올라선 미국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핵 카드가 이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핵비확산이라는 제국의 뜻에 도전해 제국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 북한은 제국의 뜻을 수용하는 대가로 "조미 적대관계의 평화로운 관계로의 전환"을 도모했었다. 이것이 총체적인 위기에 처한 북한이 살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소련의 몰락으로 위기에 처한 세력은 또 있었다. 바로 미국의 군산복합체이다. 1990년대 들어 미국 군수산업계엔 구조조정의 바람이 몰아쳤고 미국 국방비는 1980년대 중후반에 비해 거의 반토막이 났다. 하여 한반도 문제의 보이지 않는 핵심은 위기에 처한 두 세력, 즉 북한과 미국 군산복합체의 상호작용에 있었다.
위기에 처한 북한은 미국과 친해지려 했지만, 위기에 처한 군산복합체는 '북한위협론'을 필요로 했다. 미국 군산복합체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MD를 밀어붙이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2000년 들어서는 북-미-러 삼각관계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북핵 문제는 제네바 합의로 관리되고 있었기에 북한 미사일 문제만 풀리면 북미관계 정상화도 가능한 듯 보였다. 그럴수록 미국의 군산복합체에겐 북한위협론이 더욱 절실해졌다.
바로 이때 푸틴이 구소련을 포함한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7월에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곤 북미 미사일 협상 중재안을 내놓았다. 러시아가 북한의 위성을 대리로 발사해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이 목표한 바는 미국과 소련이 1972년 체결한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 사수에 있었다. 러시아가 북한의 위성 발사 수요를 대신 충족해줄 테니, 미국은 북한위협론을 빌미로 삼아 ABM 조약에서 탈퇴해 MD를 강행하려는 생각을 접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MD 구축을 최대 목표 가운데 하나로 내세운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북미관계 정상화 흐름도, 푸틴의 ABM 조약 사수도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쟁의 승자는 군산복합체였지만, 북한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핵 개발을 지렛대로 삼아 북미관계 정상화를 도모했던 과거와 결별하고 핵무력을 국체로 삼아 거침없는 행보에 나선 것이다. 2019년은 그 전환점이었다. 한미일과 '손절'을 선택한 북한은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렇듯 북러 관계 밀착에는 미국 단극체제 시기에 겪은 동병상련이 똬리를 틀고 있다. 북러가 공유해온 미국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양국 관계에 접착제 역할을 한 것이다.
때마침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격화되면서 북중, 북러 관계도 강화되었다. 이는 북한과 러시아의 대담한 행보를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북중러가 한미일만큼이나 결속된 것은 아니지만 3자가 미국 단극체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다극체제로의 전환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러-우 전쟁과 남북한의 엇갈린 선택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한반도 정세가 고도로 연결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이 짙은 이 전쟁에서 남한의 '친미'와 북한의 '반미'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미국이 한국에서 제공받아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155mm 포탄량이 모든 유럽 국가들의 공급량보다 많았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한러 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러시아는 급기야 북한과 손을 잡았다.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전방위적인 협력을 본격화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한이 러시아에 포탄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발사대까지 제공하고 러시아는 북한에 첨단 무기 기술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남북한이 유라시아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주요 무기 공급국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석열 정부가 표방해온 '가치 연대'와 김정은 정권의 '반미 연대'가 우크라이나에서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세가 심상치 않다. 작년 여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고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피로감도 엿보인다. 러시아는 장기전을 치를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고 있는 반면에, 우크라이나에는 실패한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스며들고 있다.
윤 정부가 추구해온 '가치 연대'의 실상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윤 정부는 우크라이나 지원뿐만 아니라 미국이 주도해온 인도-태평양 전략, 한미일 준군사동맹 추구,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관계 강화에 몰두해왔다. 자유·인권·시장경제 등 가치를 내세웠지만, 실은 동맹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북·중·러와의 관계는 1990년대 이래 모두 최악이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미국의 위상은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전쟁 방지와 조속한 휴전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에 등을 돌리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가자지구에서 전쟁 범죄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미국이 외교적 보호자를 자처하고 다량의 무기를 제공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대미 관계 개선의 미련을 접고 반미를 기치로 든 북한은 이를 기회로 삼고 있다. 두 개의 전쟁과 미중 전략 경쟁을 다극체제로의 전환 기회로 간주하고는 "미국과 서방의 패권전략에 반기를 드는 반제자주적인 나라들과의 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기로 한 것이다. 북한의 자신감은 대외 환경의 변화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증강은 거의 모든 이가 인정하고 우려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앞선 글들에서 소개한 것처럼, 만성적인 식량난과 경제난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군사·외교·경제 등 각 방면에서 낯설지만 만만치 않은 북한이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헤드 게임' 벌이는 북러와 골치 아픈 한미
북러 밀착이 유럽과 동북아에서 만만치 않은 변수가 되면서 국내에선 북러 관계가 더 밀착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또 미국은 북한의 도발적인 언행과 대러 무기 지원을 규탄하면서도 대화 테이블로 나와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러는 한미를 상대로 '헤드 게임'을 벌이고 있다. 무기거래와 관련해 한미가 왜곡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하면서도 군사협력의 수위를 높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최선희 방러 기간에 양국 관계를 전방위적으로 강화하기로 했다며 여기에는 "민감한 분야"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북한도 "두 나라 관계를 전략적인 발전 방향에서 새로운 법률적 기초에" 올려세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북러가 "민감한 분야"와 "새로운 법률적 기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무기거래 및 군사동맹을 명시하지 않으면서도 외부에서 이러한 해석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법률적 기초'가 1961년 우호조약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게 되면 그 파장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동맹 복원도 문제이지만, '핵보유국 소련'과 '비핵국가 북한' 사이의 조약이 아니라 두 핵보유국 사이의 조약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미래는 정해진 것은 아니다. 푸틴의 방북 시 상기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합의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지정학적 환경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북러 밀착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핵심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북러관계에 김을 빼는 작업에 있다. 한미, 혹은 한미일이 연합군사훈련의 수위를 낮추거나 유예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 긴장완화를 위한 대화와 협상을 제안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때마침 한미일은 올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이다. 또 러시아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정치협상을 줄곧 제안해왔고, 미일도 북한과의 대화를 타진해왔다.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이다. 한국이 이러한 외교적 공간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역량과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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