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이 성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민건강논평] "혐오를 위한 위압적인 질서는 해체되어야 한다"

한달 전 헌법재판소는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을 처벌해 온 군형법 제92조의 6(추행죄)과 에이즈예방법 제19조(전파매개행위죄)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군형법 추행죄에 대한 합헌 결정은 이번이 네번째였다. 성소수자의 인권 향상이 더디기만 한 현실이다.

두 판결의 공통점은 이성애중심주의와 동성애혐오가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파매개행위죄 폐지에 대해서는 2년 전 우리 연구소도 함께 한 공동 기자회견문에서 밝힌 문제의식과 주장 그대로다. 이번 논평에서는 특히 군형법 추행죄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해보려고 한다.

군형법 제92조 6은 군대 내 동성애를 범죄화한다는 점에서 대표적 성소수자 차별법으로 꼽힌다. 지난해 4월,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합의에 따라 이뤄지는 경우 해당 조항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었던 만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관련 기사 : 헌재, '동성애 처벌'하는 군형법 조항에 합헌결정)

과연 변희수 하사가 흘린 눈물을 떠올리며 먹먹함을 느꼈을 재판관이 몇이나 되었을까. 이 법조항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성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모든 판결에는 판사의 주관적 가치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만, 개별 판사가 가진 보수성향의 문제로 국한해서도 안 된다. 주류 사회문화적 인식이 반영된, 즉 우리 사회의 속살이 드러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판결에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대개 사회 질서와 안정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법은 사회 변화를 느리게 뒤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때론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소수자 권리 보호는 법에 부여된 본연의 역할 중 하나다. 법이 사회보다 앞서가는 것을 바라는 게 무리라면, 사회 변화가 반영되는 데 걸리는 '시차(時差)'를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조금씩 개선되어 온 사회적 인식만큼이라도 반영되었으면 좋으련만, 이번 결정문을 읽으면 시차보다 '시차(視差)', 즉 관점의 차이가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합헌 의견에는 동성애에 대한 후진적 인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 의무복무자들"이 "장기간의 폐쇄적인 단체생활"을 하면 "동성 군인 사이에 성적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성적 지향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비정상적인 일탈 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인식. 케케묵은 동성애 혐오론과 무엇이 다른가.

군인들이 "성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부담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더 문제적이다. 혐오란 우월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표출하는 특권의 감정이다. 특권자인 남성 이성애자들이 '잠재적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될 때 혐오는 정당화된다.

반면 위헌 의견에 제시된 것처럼 "'아직 체포되지 않은 범죄자'라는 인식 하에 본인의 성적 지향에 대한 모멸감이나 적발의 두려움 속에 군 복무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다수의 재판관에게 성소수자의 관점은 철저히 배제돼 있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이 판결이 성소수자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무심할 수밖에 없다. 이 법조항은 그 존재만으로 이들을 모욕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모욕은 곧 처벌이다. 섹슈얼리티라는 가장 내밀한 영역에 간섭함으로써,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낙인이자 억압으로 작동한다. 성소수자는 엄연히 실재하는 사회집단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혐오의 대상으로 억압받는 상황에서 개인들의 온전한 자기실현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공기처럼 사회 구석구석 퍼져 있다. 매순간 자신을 향한 혐오의 공기를 마시며 병들어간다. 때론 가슴을 후벼파는 말과 행동으로, 때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인식론적 폭력을 통해서 말이다. 억압받는 집단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침해당할 위험이 있다고 느끼는 인식에도 폭력의 억압은 존재한다.

차별적 법과 제도는 이러한 사회적 혐오에서 비롯되고 또 이것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성소수자들의 법조항 폐기 요구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제도적, 체계적 폭력에 맞서 자유와 존엄, 품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한편 우리의 비판은 사법부를 넘어 국가를 향해야 한다. 사법부 역시 국가 권력의 한 요소로, 국가 권력은 항상 법을 통해 행사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폭력과 관련된 하나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인 것과 위법적인 것으로 나누면서 '합법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또 다른 국가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성소수자를 처벌하고 억압하는 것일까. 국가가 개인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본다면, 왜 국가는 성소수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며 사회의 품위를 훼손하는가. 이는 국가가 생각하는 품위가 이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말했듯, '문명화', '선진적', '청결', '자기통제력'과 연관된 의미로서의 품위는 질서의 관념과 연결된다.

근대 국가권력의 목적은 '정상적', '표준적' 인간을 양산하는 데 있다. 이때 품위의 핵심은 지배집단의 문화와 규범만을 보편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문화제국주의적 질서에 순응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성애 규범에 따르지 않는 성소수자는 국가의 품위와 사회 질서를 훼손하는 자들로, 훈육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군대는 이런 목적에 최적화된 제도적 장치다. 국가가 법조항을 포기하지 않는 진짜 이유가 과연 군기 확립과 전투력 보존 때문일까. 아니면 동성애자를 처벌받아 마땅한 '변태 성욕자'로 표상함으로써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고 성소수자에게 이성애 규범을 강제하도록 만드는 군 제도 본연의 효과를 강화하기 위함일까.

우리 대부분은 질서를 원한다. 때문에 질서의 근간이 되는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권에 반하는 법과 질서마저 긍정할 수 없다.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이 성소수자의 사회적 고통을 무화시킬 만큼 가치가 있나. 이것은 누구를 위한 두려움이고 무엇을 위한 질서인가. 질서는 어디까지나 도구적 가치일 뿐, 혐오를 위한 억압적 질서는 해체되어야 한다.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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