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노무현과 함께 '노동 정책' 여정에 접어들어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통일민주당 노동정책연구소가 출범하기까지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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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갓 출범한 통일민주당이 국회 상임위별 전문위원을 공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가운데에는 노동 분야 전문위원도 포함되어 있단다. 서울역 염천교 건너 중림동 한 켠에 자리잡은 통일민주당에는 시대의 거인, 김영삼과 김대중 노장 둘이 함께 있던 때였다.

나는 시험을 보고나서 통일민주당 노동분야 전문위원으로 공채되었고, 얼마 안 되어 정책실장이던 서울 법대 출신 이신범 후배로부터 당의 수석전문위원이 되었음을 통보받았다. 당시 전문위원실을 관장하는 당 정책위원회 의장 자리는 박찬종 의원을 시작으로 강삼재 의원, 그 다음엔 황병태 의원이 뒤를 이었었다.

때는 국가정보부와 계엄사령부, 청와대가 막나가던 1987년 전두환 군부 독재시절 말기였고, 통일민주당이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폭발하기 직전의 시대, 거리와 신문에 나라의 민주화와 노동조합 결성의 바람이 치솟아 오르던 시절이었다. 중림동에 있던 통일민주당 당사는 얼마안가 공덕동 로터리 높은 빌딩으로 이사했다. 어떻든 세월 따라 나도 분주했다. 참고로 그 시절 민주화운동 흐름을 정리해 본다.

1980년대 민주운동 약술

- 1979. 10 .26 :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계엄령.

- 12.12 : 전두환, '하나회'로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장악.

- 1980. 5.17 : 계엄 전국확대. 정당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정치지도자 체포.

- 5.26 :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반대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로 진압.

- 1981. 3 : 계엄령 하에서 7년 단임의 새 헌법을 통과시키고, 새 헌법에 의거해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 제5공화국 출범.

- 1984 : 학원자율화와 정치인 해금 조치 등의 유화정치를 실시하였으나 오히려 야당, 재야인사, 시민운동세력,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동원체를 조직하고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

- 1985. 2.12 : 총선에서 사회운동세력들이 해금된 보수야당 정치조직인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한민주당의 선거운동을 적극지원. 신당바람에 힘입어 신한민주당이 대안정당으로 등장.

- 1986. 2.12 : '천만 개헌추진운동'으로 거리의 대중 동원 성공.

- 4.30 : 전두환, 개헌협상 테이블 양보했으나 교착상태. 학생들과 사회운동 세력의 거리시위 격화.

- 12.24 : 명목상 총재인 이민우 구상 발표에 김영삼 김대중은 66명 의원을 이끌고 나와 김영삼을 총재로 하는 신당 '통일민주당' 창당.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사회운동세력들의 야당에 대한 신뢰 회복.

- 1987. 4.13 : 전두환은 현행 헌법 방식에 의해 대통령직을 후임에게 승계하겠다는 호헌선언이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운동 형성의 계기가 됨.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으로 방관자였던 중산층들이 거리 시위에 적극가담, 제도권 야당과 사회운동세력들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규모의 민주화 연합조직 결성.

- 1987. 6.10 : 12.12사태 주역 중의 한 명인 노태우의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일에 맞추어 전국적 규모의 국민조직인 '6월 민주화운동' 시작. 이 운동은 야당, 사회운동 세력, 학생, 중산층을 포함하는 최대 민주화연합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줌.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됨.

- 1987. 6.29.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운동연합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로 수용됨. 야당은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분열, 각각 김영삼과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선거운동 전개.

▲6.29 선언 직후 회동하고 있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노무현 의원과 함께 김영삼 총재 자택으로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나섰다. 물론 나는 김영삼 총재를 위해 뛰었다. 나의 선거운동 동지들은 해고된 택시 운전기사들. 정의와 자유에 목마른 청년들이었다. 서울 이리저리로 전단을 돌리며 휘돌았다.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든 여의도광장 일대도 누볐다.

결국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이 양분돼 민정당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조금 지나 강원도 태백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함태탄광 노동조합 지부장 출신 유승규 의원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는 걸 도왔다.

이때 겪은 일 하나를 덧붙여 기록해야 하겠다. 민주주의 함성이 전국의 하늘 끝으로 치솟던 시절 어느 날, 김영삼 총재가 전문위원들과 모처럼 저녁 만찬을 가졌다. 그때 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시대의 자동벨트 위에 떼 지어 대소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대통령 되고자 하는 총재님 꿈도 허망해질 것입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합니다."

이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김영삼 총재는 노무현 의원과 함께 상도동 자기 집으로 오란다.

꼭두새벽에 상도동 총재 집으로 찾아갔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에 새벽마다 총재가 뛴다는 언덕길을 오른 뒤, 알맞은 시간에 총재 댁에 들어가 앉았다. 아침 밥상이 먼저 나왔다. 작은 상에는 밥 한 공기, 미역국 한 대접, 계란부침 하나씩 세 사람 몫으로 담겨 나왔다.

식사에 앞서 김 총재가 기도를 했다. 나라를 위해, 노무현 의원을 위해, 또 나를 위해. 그런데 아뿔싸, 기도 중에 내 이름을 잊으셨나보다. 곧 이름 석 자 대신 신 위원으로 대체했다. 웃음이 나왔지만, 고맙기도 한량없었다. 그날 보았다. 맞은편 천장 높게 걸린 '대도무문(大道無門)'이란 글자가 쓰인 큰 현판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말씀 한 구절도 떠올랐다.

다음날 '통일민주당 노동정책연구소'가 설치됐고, 내가 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었다. 고문은 젊고 팔팔한 노무현 의원과 이인제 의원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었던 두 사람은 나를 형이나 선배로 부르곤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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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안성에 정착해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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