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 7년 몸담은 노조에서 쫓겨나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다시 시대의 미아가 되어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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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여기저기에 뿌리내 협동조합 마을 '키부츠'는 움츠려있던 내 마음에 자본주의 하에서도 이상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꺼지지 않는 꿈과 이상의 불씨를 심어 주었다.

대한전선 노동조합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모처럼 맛본 현지 이스라엘에서의 자유의지를 뒤로 하고 누군가의 그릇된 제보로 백주대낮에 느닷없이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 들어갔다.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정보요원이 하는 말이, 바로 이곳이 신인령이 고문 받던 방이란다.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였다. 그런 후 무릎을 꿇게 하고는 문초했다. 그리고 한동안 학생운동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오랜 동안 경찰서 철창신세가 되어 지내게 될 줄이야.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하였는가? 유신체제 하의 무소불위 각종 긴급조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찍히면 진위 여부를 가릴 틈도 없이, 영장 없이도 무조건 끌려들어 갔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꿀려야 했다. 나도 그러했다.

심문 내용은 세 가지가 다였다. 내가 텔아비브에서 노래한 '백치 아다다'가 북한의 노래가 아니냐는 것이 하나, 텔아비브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하룻밤 잔 것이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둘, 학생 운동권에서 떠도는 노래인 '붉은 꽃'은 어느 공산국가의 노래냐 하는 것이 셋.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공산국가, 특히 북한 노래집을 뒤져본들 나올 턱이 있겠나. 그도 그럴 것이 '붉은 꽃'은 엄연히 내 머리로 작사작곡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다다'도 우리나라의 대중민요이며,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가에서 하룻밤을 잔 것이 뭐가 문제인가. 더 해줄 말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로서도 더는 추궁할 것이 없었다. 단숨에 답안을 내놓았는데도 일주일이나 지하 심문실 구석에 갇혀 밤마다 얇은 군용 담요 하나만 덮고 웅크려 자야 했다. 어떤 날 한 중년 사나이가 복도를 지나가면서 나에게 소리치는 말, "야, 임마! 정치학과를 나왔으면 정치나 할 게지, 웬 노동조합 일이야!"

번개같이 한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하, 그렇구나! '5월의 자유의 봄' 날도 지난날이 되었으니, 나마저 노동조합에서 쫒아낼 명분을 찾아내야 했기에 그랬구나! 이스라엘에서 한방에 같이 지낸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일러바쳤구나. 이제야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더구나 어느 날 심문관이 나에게 던지는 말, "김장선(지부장 직무대리)을 봤더니 아주 나쁜 놈!"이더란다. 그렇구나! 어느 날부터 그들은 나도 몰래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심문관은 나에게 심문할 만한 게 더는 없으니, 밤이면 명동 뒷골목에서 사왔다며 순대와 소주 몇 병을 내놓고 나와 마주앉아 같이 먹었다. 그리고 일주일가량 지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왔었다는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얻어놓고, 운명의 갈림목 같던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해방되어 나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대한전선 노동조합에서도 쫒겨났다.

김장선 지부장 대리는 나를 내보내는 이유로 내게 줄 월급이 없단다. 거짓말인 줄 나는 안다. 나의 급료는 이미 노동조합 1년 사업계획안의 인건비로 책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더 이상 남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노동조합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타의 반 자의 반의 결정이었다. 따져보니 노동조합에 몸담은 지 7년 6개월 11일. 그 달의 조합원 수는 1만 2627명이었다.

그동안 대한전선 노동조합의 일을 하면서 키운 바람이 있었던가? 있었다. 그것은 한달수 지부장이 전국금속노동조합 위원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 역시 상급조직인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되길 바라는 꿈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위원장이 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한달수 지부장을 따라 전국금속노동조합 본부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나아가, 우리나라 노동조합 운동을 살찌우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때는 한국 노동운동 위에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던 전두환 독재의 시절. 전국금속노조 위원장으로의 출마를 선언한 한달수는 누구보다 착하고 활동적이었지만 못된 시대와 맞설만한 전략과 지략을 갖춘 큰 그릇은 못 되었다. 사무국장이나 부지부장단들도 극한전선을 돌파해 낼만한 용기와 전국적인 일을 도모할 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전국에서 용산 삼각지 금속노동조합본부 작은 강당에 모여든 대의원들의 투표 결과, 참패한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자 나의 꿈도 사그러들었다. 그저 노동조합 월급쟁이일 뿐.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내야 했다. 그렇다고 나는 조합원의 신분이 아니었기에 노동조합 대표자리에 도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자 노동조합 대표자 입장에서 보면 나 또한 한낱 거추장스러운 이방인으로 여겨질 뿐이었을 것 같았다. 사무실의 분위기에는 도통 생기가 없었다. 대외적인 일에서도 나를 배제하는 게 뚜렷해 보였다. 그들(?)은 그렇지 않은 듯이 행동해도 모든 행동거지가 어색해 보이기만 했던 것이다. 시대 역시 독재자 박정희의 권력을 제2의 쿠데타로 이어 받은 전두환 군부 독재의 검은 구름이 하늘 가득히 드리워져 있는 때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국금속노동조합 선거운동의 대열에서 소외되어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만사태평', '안일무사', '안방거사'가 그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안기부 눈초리'가 그들을 대책 없이 웅크리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우물 안 개구리들! 그들도 딱하고 나 자신도 딱해 보였다.

나 역시 1980년 서울의 봄 전후의 시기에 미래에 대한 고뇌로 홀로 선택에 기로에 서게 됐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안 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나로서는 밥줄이 끊겨지더라도 더 이상 남아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한전선 노동조합에서 몸 털고 미련 없이 나왔던 것이다. 내 나이 서른 중반 때의 일이었다. 그곳에는 나의 부대, 나의 군사, 나의 동지들이 없었다! 대기업 노동조합의 참모였을 뿐이었다.

<계속>

▲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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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안성에 정착해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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