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 생활 그리고 재판, "나는 죄가 없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당신, 신금호 맞지?" 그렇게 끌려가다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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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에게 그녀를 소개해준 동수와 함께 안양의 관악산 계곡길을 걸었다. 조그마한 물길 막음터에 닿아 입은 옷 그대로 셋 모두 물에 몸을 담갔다. 밤이었다. 모두가 가릴 것도 없었고 거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헤어졌고 나와 그녀 둘만 다시 만났다.

그녀와 안양천 곁 나의 거처 천막집으로도 갔고, 그녀 옆에 붙어 구로공단 오거리 시장에 있는 그녀만의 자취방에도 가보았다. 어떤 때는 대학 후배들 안양노, 박순식과 더불어 공단 시장에서 사온 물고기를 연탄불에 끓여 후후 불며 같이 먹었다. 막걸리도, 김치도, 밥 한술도. 밤늦어 후배들과 함께 그녀의 자취방에서 같이 잤다.

나는 도망자였으나 낮이면 그녀와 함께 공단길을 걸었다. 양남동 안양천 뚝방길도 함께 걸었다. 어떤 때는 수원으로 내려가 원천 저수지를 휘돌았고, 쨍쨍 내리꽂는 늦여름 햇살 받으며 동수원 고개길도 걸어 넘었다. 걷다가, 또 웃다가 그만 그녀의 구두 뒤축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맨발이 되어 걸었고, 잠시잠깐 내 등에 업히기도 했다. 쨍쨍한 늦여름 신작로에서의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옭죄던 마음이 느슨해져갔다. 세브란스 의대 본과 1학년에 복학한 그녀가 수유리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내가 옮길 자취방을 구하러 그녀와 함께 공단오거리 허름한 언덕 비탈동네를 휘돌았다.

어느 화창한 여름 한낮 나는 혼자 느긋한 마음으로 인왕산 밑 현저동 뒷골목을 걸어 우리집 가게에 닿았다. 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가게 문턱을 넘어 안채 툇마루에 걸터앉으려 할 때, 한 남자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며 나를 보고 대뜸 하는 말이 "당신, 신금호 맞지?" 그게 다였다. 그는 즉시 나를 남대문 경찰서로 데려가 유치장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다.

때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긴급조치가 내려진 상황인지라 영장 없이도 체포, 구금, 신문하는 막무가내 시절이었다. 잡히면 모든 것이 끝나던 시절이었다. 남대문 경찰서 사무실을 지날 때 어느 사복 경찰이 지나가는 나를 보며 던지는 말이, "산적처럼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데 곱상하네!"

유치장에서 지내며 취조실만 오갔다. 한동안 나에게 물고문으로 겁을 준 것 말고는 특이한 고문이 없었다. 필사한 노트를 손학규에게 빌려준 것 하나뿐, 나에게 달리 추궁할 것이 없으니, 반공법 사건치곤 너무도 단순했던 게 아닐까. 더구나 나와 손학규는 정치학도이기에, 옆나라 중국도 알아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박정희 제1의 국시인 '반공'에 조금치라도 역행하는 기미가 보이면 골로 가는 세상이었으니, 죄가 있든 없든 나는 빨간 삼각천을 가슴에 붙이고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수치의 일탄(一彈), 바지를 까고 간수들 눈앞에 엉덩이를 벌려야 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편찬해 일본어로 번역된 장질의 <세계철학사>는 친구인 한국일보 유주석 기자의 도움으로 한국일보사 자료실에서 대출해 본 게 탈이었다. 나로 인해 유주석 기자도 유치되었다. 그는 기소유예로 곧 석방되어 나갔지만, 나로서는 유주석 동문에게 너무도 미안해 마음이 아렸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반공법 위반자로 체포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일간지들 구석에 나왔더란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

잡범들과 뒤섞인 좁은 콘크리트 미결수 감방에서 반공법 위반자로서의 수형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엔 먼저 들어온 젊은 감방장이 나에게 텃세를 부리더니, 며칠이 안가 가슴에 빨간색 삼각 천을 단 나와 말을 주고받는 형님 동생이 되었다. 대소변은 훤히 보이는 감방 한 켠에서 보고, 하루 한번 세수를 하러 급한 나갈 뿐, 자나 깨나 좁은 감방에서 젊은이들과 붙어 지냈다.

감방에서 함께 지내던 미결수 대여섯 명은 모두가 나보다 어리고 젊었다. 아무런 숨김도 가식도 없었다. 한결같이 착해 보였다. 나는 감방 동료들에게 형뻘로 대우받으며 백 일을 같이 지냈다. 감방 안에선 부동의 자세로 벽에 붙어 기 운동만 할뿐, 달리 할 게 없었다. 다만 오가며 우연히 마주친 무리들 속에 섞여 지나치는 지하 형을 보았다. 눈이 나와 마주치자 형도 몹시도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나에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형님의 표정!

감방 젊은 동료들이 담당 판사한테 탄원서를 쓰라고 보챘다. 마지못한 심정으로 탄원서를 썼다. 내용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정치학도다. 정규과목으로도 모택동 사상도 공부했고, 민병대 학장의 정치사상사 교육과목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학도로서 모택동 사상을 둘러보고 사회주의 사상을 살펴본 게 잘못인가? 정치학도로서 사회주의 사상을 살펴본 게 잘못인가? 고려대 김상협 교수도 문리대에서 모택동 사상을 강의하지 않았던가. 그 가운데에는 <모순론>도 <실천론>도 함께 있었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

감방 생활 백 일이 지나도록 찾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강신옥 변호사만은 한 번 보았던 것 같다. 반입된 물건은 어머니가 넣어주신 무명의 흰 저고리, 흰 바지 한 벌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종래 입지 않았다. 훗날 출감할 때 동생처럼 지내던 젊은 감방장에게 넘겨주고 나왔다.

출감해 들어보니 어머니는 누나와 함께 두루두루 변호사를 찾았으나 맡아주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란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강신옥 변호사와 민 모 변호사가 무료로 내 사건을 맡아 주셨단다.

감방 생활 백 날 가량이 흐른 초겨울 어느 날, 호송 버스에 실려 재판정으로 갔다. 방청석에는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유인태를 비롯한 대학 후배들 몇몇이 뒷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담당 검사도 안 보였고, 담당 변호사도 없었다. 재판관 말을 받아 최후진술을 하였다.

내가 한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덧붙인 말은 "나와 같은 일이 이 세상에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최후진술이 끝나자 재판장이 내린 판결은 나로서도 의외였다. 재판장은 "무죄!"라고 하며 방망이를 세 번 두드렸다. 재판장의 슬기와 용단, 너무나 고마웠다.

다행히도 고등법원에서 무죄, 대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내가 구속된 이유가 얽혔던 손학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두가 어머님의 사랑의 기도 때문이었고, 강신옥 변호사님의 헌신, 떠나온 탄광 이선휘 소장님의 의리 덕분이었다. 훗날 나와 손학규는 강신옥 변호사, 이선휘 소장님을 만나 진탕으로 맥주를 마시고 여관에선가 호텔방에선가 하룻밤을 같이 잤다.

▲ 박정희 정부 시절 민청학련 사건 등을 변호한 1세대 인권변호사 고(故) 강신옥 전 의원 ⓒ연합뉴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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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안성에 정착해 도예가로 제2의 인생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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