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국회 앞에서 30만 명의 교원이 7차 추모집회를 열은데 이어, 서이초 교사의 49재인 오늘은 교사들이 제안한 '9.4 공교육 멈춤의 날'이다. 교육부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학기 중에 수업에 불참하는 연가나 병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교원 휴가에 관한 예규' 를 들어 교사들의 집단행동과 학교의 재량휴업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사들은 평소 '법과 원칙' 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왔던 자신들이 그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바로 그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서이초 교사 사망사고는 교육공동체라고 하는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학교 교육현장에서 어떤 문제적 상황을 겪고 있는지 드러냈다. 사교육이 입시의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교육적 기능에서 교사의 지위는 약화된지 오랜데다가, 돌봄 역할을 강화하려 해도 막상 학생에 대한 생활지도권은 잘 실행되지 않는다. 게다가 교사가 아이 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감정노동 대상으로 전락한 실태를 담은 소위 '진상학부모 열전'(학부모 교권침해 민원사례집)은 기가 막힌다.
교사들은 이렇게 된 이유가 아동학대처벌법이라고 지적하며 법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법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아동학대에 대한 국가적 개입의 필요성 때문에 2014년 제정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교사도 아동학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보호자로 포함되어 신고-출동-조사-격리의 즉각적 절차를 따르도록 되어 있다. 학교 교육과 돌봄의 제공자이면서, 동시에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행위가 '학대 의심 정황' 만으로도 학생과 학부모의 신고대상이 된다면 그 이중적 지위에서 교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학생에 대한 적법한 교육적 목적의 생활 지도가 위축되고, 학교는 더 이상 자신의 직업적 소명과 전문가로서의 신념을 실천할 수 없는 공간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공간에서 교육 노동자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교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반면 교육부는 불과 6개 지자체에서 운용 중인 학생인권조례를 교권침해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현장의 많은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하지 않으며 그런 접근이 본질을 흐린다고 지적한다.(☞ 관련기사 : '칼부림'도 학생인권조례 때문? 서이초 비극 '발판'삼는 보수교육계) 따라서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교사들의 정당한 노동권 행사를 금지한다는 교육부의 발표는 문제의 기저에 놓인 구조를 왜곡시키는 잘못된 처방이다.
우리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아동 청소년들이 공통의 학습과정을 이수하는 학교 교육을 넘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책무를 가지는 개인으로 성장시키는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 아동학대처벌법을 개정하거나 학생인권조례에 학생의 책무성 조항을 넣는 것으로 충분할까?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교사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 교사와 동료 교사, 즉 교육 주체들 간의 비공식적이고 개별적인 의사소통이 제도화된 학교 교육의 미시적 과정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서이초 교사 사망사건은 특히 갈등을 해결할 때 거의 고립적인 상태에서 교사가 학부모와 교육당국에 대응해야 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른 피해교사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는 교육이 본질적으로 교육 주체들간의 상당히 전인적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용인하면서도, 사회적 기본가치에 대한 합의나 개인화된 속성과 사회문화적 변동이 교육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고 주체들의 권한에 대해 조정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와 사회에 지배적인 가치나 믿음과 별개가 아니다. 그래서 인권은 애초에 의무와 책임과 무관하게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생인권조례에 학생의 책임을 늘린다는 발상이나, 업무폰을 지급하여 교사의 개인전화번호 노출을 막겠다는 조치는 우리가 교육이라는 과정과 의미에 부여하는 광범위한 위임에 비하면 지극히 말단적이고 기능적인 대책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교육부 차관과 여당 정책위 의장의 "공교육은 한순간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에 반대하며, 교사들의 오늘 공동행동과 추모집회를 지지한다.
우리는 지금 교육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현장들이 어디로 더 나아갈 수 없어 멈춰야 하는 막다른 벽 앞에 서 있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동료 시민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죽음을 충분히 돌아보고 같은 희생이 나오지 않게 하는데 소홀했다. 동료 노동자가 사망한 현장을 흰 천으로 가리고 그 옆에서 작업을 이어간 현장은 얼마나 참혹한가. 서울 시내에서 축제를 즐기던 159명의 시민들이 압사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즉시 애도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이 끝나자마자 아무일 없던 듯 돌아오려 했던 정치는 얼마나 잔인했나. 작년 여름 큰 비에 반지하 방에서 사람을 잃는 일에 절망했는데, 물에 잠긴 터널 속에서 같은 참사를 반복한 것은 얼마나 끔찍한가.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들을 주의깊게 응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많은 목소리들이 잦아들 때까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책임이 명확해질 때까지 더 많이, 더 오래 멈춰 서야 한다.
이제 교사 집회는 교사들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들, 그리고 시민 모두가 지켜보는 거대한 교육의 현장이 되었다. 교사들의 억울한 죽음은 저출산, 입시 경쟁, 소위 학벌이 전생애에 미치는 불평등과 맞물려 학교 교육에 걸려있는 사회적 과부하와 무관하지 않다. 교사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검은 점'들이,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여러 난관들을 교차하며 풀어가는 검은 물결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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