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포퓰리즘에 대처하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

[이관후 칼럼]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막을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예일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후안 린츠는 1978년에 쓴 <민주주의 정권의 몰락>(The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에서 어떤 정치인이 민주적이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이를 토대로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위험한 정치인을 식별하는 '4가지 경고 신호'를 개발했다.

-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의 규범을 거부

-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

-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

- 언론과 정치적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

이 중에서 몇 가지 해당이 되어야 반민주적 정치인에 해당되는 것일까?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이 기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우리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의 깊게 관찰한 다음 해야 할 일은, 이런 정치인이 권력의 중앙 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은 누가 하는 것일까?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정당'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임을 강조했다. 정당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에 위기가 발생한다. 그 징후는 어떤 것들일까?

- 정치인들이 경쟁자에게 반국가세력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 대통령이 의회를 우회해 시행령을 남발한다.

- 정부가 국가기관을 여당 인사로 채우고, 비판적인 언론의 입을 막는다.

- 의회가 행정부를 혼란에 빠뜨리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탄핵을 추진한다.

페루, 그리고 한국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이 책에서 트럼프를 자세하게 언급하기 전에 전형적인 '프로토타입'으로 한 인물을 소개한다. 1990년에서 2000년까지 페루의 대통령을 지낸 알베르토 후지모리다.

그는 처음부터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인 후손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대학의 총장이 된 그는 인지도를 높일 목적으로 대선후보로 등록했는데, 놀랍게도 당선되고 말았다. 여러 우연이 연속적으로 겹쳐서 낳은 우발적 결과였다.

그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페루가 "공화국 역사상 가장 중대한 위기"에 처했고, 사회 전반이 "폭력과 부패, 테러, 마약 범죄로 파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후지모리는 '복잡한 의회정치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참을성도 부족했다'. 그는 정당 대표들과 만나 협상하는 대신 그들을 '놀고먹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고, 의회를 우회하기 위해 시행령을 활용했다. 정부에 비협조적인 판사들을 '비열한 인간', '악당'이라고 표현했다.

후지모리는 경영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페루는 "강력한 소수와 독점, 파벌, 로비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 아직 남아 있는 금기를 모두 없애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씩 제거해 나갈 것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오랜 장벽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후지모리는 군부와 손잡고 자신을 반대하는 의회를 집권 2년 만에 강제로 해산했다. 기득권과 부패로 지목된 정치엘리트들에 대한 공세는 대체로 환영받는다.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81%까지 올랐다. 일본의 경제적 지원도 한 몫 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후지모리는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3선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세 번째로 당선된 2000년, 국가정보부장이 야당 의원들을 매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집권 기간 동안 있었던 불법적인 사법부와 언론 장악 과정, 선거 과정에서 야당 후보의 도청, 유권자 명부 조작, 국고 유용 등 각종 비리가 연이어 쏟아져 나왔고,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해외로 도피했다.

그는 아시아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경제포럼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출국한 뒤,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팩스로 대통령 사퇴서를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이중국적자였던 그는 일본 극우정당의 참의원 후보로 출마하는 기행도 보였지만, 결국 본국에 송환되어 25년 형을 받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지모리의 딸'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치적 자산이 없는 게이코 후지모리가 36살이던 2011년 이래 3번의 대선에 출마했는데, 결선투표에서 각각 48.5%, 49.8%, 49.8%라는 아슬아슬한 패배를 당했다는 점이다. 게이코 후지모리가 이끄는 당이 원내 1당이 되자, 대선 상대였던 대통령은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사면해주었다. 지병으로 수감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전 대통령 ⓒ위키피디아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막을 방법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저자들은 헌법이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독립적인 정부 기관을 자신의 측근들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금지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또 헌법 조항에는 수많은 공백과 모호함이 있기 때문에, 개별 조항들은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들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들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선포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여 그들을 정치 밖으로 추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정의이고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신성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서, 열성적인 지지자들로 우리편을 구성해 나가야 할 것 같다. 그런가?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생각에 별로 동조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저자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제시한 2가지 원칙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다. 상호 관용은 정치적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걱정하는 정당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가 선거에서 이길 때 우리는 그날 밤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선거 패배를 곧 재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 자제는 법적으로 허용된 합법적인 정치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예로 드는 것은, 미국 대통령의 3선연임 금지다. 사실 1952년까지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는 조항이 없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2번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을 뿐이다.

이후 첫 시험대에 오른 토마스 제퍼슨은 '대통령 임기가 관습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면, 명목상의 임기는 종신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나는 훌륭한 전임자가 남긴 건전한 선례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은퇴했다.

그러자 가장 야심 있는 대통령들조차도 이 관례에 도전하지 않았다. 2번의 임기는 '성문화되지 않은 헌법조항'으로 받아들여졌고,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이를 어기려고 하자 결국 헌법조항이 추가 되었다.

제도적 자제를 하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 모호한 법률 조항을 최대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특히 시행령의 한계를 광범위하게 넓게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하지만, 그 안에서 최대한 거칠게 상대를 몰아붙이고 영원히 승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이며,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계속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다만 정치적 경쟁 상대를 없애버리려는 전투적 자세다. 트럼프가 바로 이런 정치인이었다.

왜 공화당처럼 싸울 수 없는가

트럼프가 집권하자 미국의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탈선'하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민주주의에 위협적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식견 있는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그래서 한 미국 정치학자는 '모든 사안에 대해 민주당의 태도는 지극히 단호해야 한다'면서 '지저분하게 싸우라'고 주문했다. 언론인들은 '민주당은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면서 '공화당의 전략을 그대로 가져와서 모든 사안에 반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이것이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4가지 이유가 있다.

- 지금까지 사례로 볼 때, 이런 대응전략은 오히려 전체주의 등장과 지속 가능성을 높였다.

- 이런 전략은 중도 유권자를 위협해서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 여당 내 반대파들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서 단결시킨다.

-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면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중도를 포괄하는 '넓은 민주주의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연합을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정치적 규범은 무엇일까? '예의와 협력'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품위 있는 공존의 정치'다.

정치인들 뿐 아니라, 시민사회, 경제인, 종교인, 그리고 상대 정당의 합리적 정치인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선명성은 내려놓아야 한다. 핵심적인 목표의 차별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도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낙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의료보험에 대해서는 같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넒은 민주주의 연합 전선을 형성해야 할까? 저자들은 우선 당파적 증오심을 줄일 수 있는 선거제도의 개혁을 언급한다.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도 필요하다.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로 치면 부동산이나 입시, 교육현장, 산업현장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줄여나가는 노력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늘 이런 문제에서 갈등을 줄이기보다는 편을 갈라서 이익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문지기는 바로 '정당'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이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정치를 진흙탕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정치로부터 무관심해질수록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역할을 해야 할 정당은 어디일까?

▲ 국회 본회의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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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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