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미친 짓'을 끝내라

[정욱식 칼럼] 한국전쟁 한 번 더 하겠다는 건가

2023년 6월 15일은 분단 이후 남북 정상들이 최초로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3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기념식이 있어야 할 자리엔 역대급 무력시위가 있었다. 한미동맹이 북한과 인접한 포천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이 훈련에는 한국군의 F-35A 전투기, K9 자주포와 미군의 F-16 전투기, 그레이 이글 무인기 등 첨단 전력 610여 대가 동원됐다. 이들 무기가 내뿜은 막강한 화력에 고무된 탓인지, 윤석열 대통령은 현장에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적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강군만이"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질세라 북한도 두 발의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발사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곤 북한 국방성은 "우리 무력은 적들의 어떤 형태의 시위성 행동과 도발에도 철저히 대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무력시위를 통해 두려움 주기 공방전이 또다시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식 '공포의 균형'은 가능할까? 불가역적인 핵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또 무력시위 공방전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한반도를 보면서 던져본 질문이다.

공포의 균형은 냉전 시대에 유행했던 말이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다. 수만개의 핵무기로 무장한 미국과 소련이 '나를 건들면 너도 죽는다'며 모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생존을 의존했다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줄임말이 매드(MAD)다. 이 말 속에는 미국과 소련이 모두가 죽을 수 있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과 이성에 대한 최저치의 호소가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이건 아슬아슬하게 작동했다. 혹자들이 냉전을 '긴 평화'라고 부르고, 공포의 균형이나 MAD를 '전략적 안정'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그럼 미국 핵과 북핵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한미동맹과 북한의 두려움 주기 공방전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한반도는 어떨까?

미소 냉전 시대보다 한반도의 핵시대가 더 불안할 공산이 크다. 우선 지정학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과 소련은 5500km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반면에, 한미동맹과 북한은 휴전선을 맞대고 있다. 이는 미소 냉전 시대에 비해 남북한 사이의 우발적·국지적 충돌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정전협정 이후 여러 차례의 무력 충돌이 접경 지역에서 발생했다.

또 냉전 시대에는 사실상 MD를 금지한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이 있었지만, 한반도 안팎에선 한미일의 MD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ABM 조약은 1972년 이래 30년 동안 미소(혹은 미러) 사이의 군비경쟁을 억제하고 위기관리 및 신뢰 구축에 크게 기여했었다. 2001년까지 세계 도처에서 있었던 각종 정상회담에서 이 조약을 가리켜 "국제 평화와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고 불렀던 까닭이다.

하지만 ABM 조약이 미국의 일방적인 탈퇴 선언으로 2002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래, 미러와 미중 사이의 군비경쟁은 치열해져왔다. 중러 간의 전략적 결속도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그런데 ABM 조약 파기의 여파는 한반도가 가장 크게 받아왔다. 미국은 이 조약의 탈퇴 및 MD 구축의 최대 구실로 북한을 삼았고 MD의 명시적·잠재적 상대국들인 북·중·러와 가장 가까이 있는 한국을 포섭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한중관계의 '게임 체인저'가 되어버린 사드 배치도 이 조약이 유지되었다면 금지되는 것이었다. 이 사이에 MD와 북핵은 '적대적 동반 성장'을 거듭해왔다. 한미일이 북한에 대응해 MD를 강화할수록 북한은 MD를 무력화하기 위한 다양한 미사일을 개발해왔다.

1970년대 미소 데탕트는 ABM 조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 미소가 1989년에 냉전 종식을 선언한 데에는 미국이 MD의 원조격인 '전략방위구상(SDI)'를 사실상 철회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북한을 상대로 한 MD는 당연시되고 있다. 한반도가 불가역적인 핵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전략적 안정을 기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근거가 아닐 수 없다.

미소 냉전과 한반도의 상황을 비교할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소는 1933년에 관계를 정상화했고, 냉전 시기와 러시아가 소련을 승계한 이후에도 대사급 외교관계는 유지되어 왔다. 또 핫라인도 있어왔다. 이러한 소통 구조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비롯한 여러 위기들이 핵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심지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도 미러 대화 채널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반해 한미동맹과 북한 사이에는 이렇다 할 소통 구조가 없다. 북미관계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75년 동안 한 번도 정상화된 적이 없고, 남북관계도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나마 유지되었던 남북 통신선도 2023년 4월에 끊겨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무력 충돌과 유사시 확전을 막을 수 있는 마땅한 대화 채널은 없는 반면에, 말폭탄과 무력시위는 넘쳐나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한미동맹과 북한은 극단적인 언어와 최강의 무력시위를 동원해 상대방에게 절멸의 두려움을 안겨주려 한다. 전쟁이 터지면 한미동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한은 '대한민국'을 지도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곳은 한반도가 유일하다. 가히 '매드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냉전 종식의 주역인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면서 도모하는 안보는 '하책'이라고 봤다. 오히려 상대방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을 때 나도 안전해질 수 있다는 '신사고'를 강조했다. '전쟁불사론'이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갇혀 있는 남북미 정상들이 한번쯤은 곱씹어보길 바란다.

▲ 윤석열(왼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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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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