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다음 소희> 작품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알고 싶었다."
6년 전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특성화고 학생 고(故) 홍수연 양의 죽음을 처음 세상에 알린 허환주 <프레시안> 기자와 이 사건을 <다음 소희>라는 영화로 만들어낸 정주리 감독이 입을 모아 말했다. 취재를 시작하고, 영화를 만들게 된 각자의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 질문을 던진 권해효 배우는 "무엇이든지 짤로 소비되고 빨리 소비되는 시대에 탐사보도라는 느린 발걸음을 해온 한 기자와 긴 호흡의 영화를 만드는 영화 감독, 두 느린 호흡이 <다음 소희>를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프레시안 주최로 18일 서울 마포구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 <다음 소희> 상영회가 열렸다. 상영회가 끝난 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고(故) 홍수연 양의 죽음을 취재했던 허환주 프레시안 편집국장과 영화를 만든 정주리 감독이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사회자(모더레이터)로 권해효 배우가 함께했다.
아동폭력을 다뤘던 <도희야> 이후 정 감독의 9년 만의 차기작인 <다음 소희>는 청소년 노동, 특히 소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현장실습'을 파헤친다. 영화는 현장실습에 나간 소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경찰인 유진이 그 죽음의 실상을 밝혀가는 과정을 담았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육 시스템의 문제"
정주리 감독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홍수연 양의 사건이 발생한 2017년 '탄핵 정국'을 회상하며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2020년 말 이 사건을 영화로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시간차가 큰 사건인데, 이 사건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당시 내가 뭐했는지 되돌아보니 이 사건이 최초로 보도됐을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와중이었다"고 했다.
이어 "대통령 탄핵이 뭐가 그렇게 (나와) 가까웠는지 당시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반면 어느 한편에 있던 이 일은 뭐가 그렇게 (나와) 멀기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났는지 모르겠다"며 "공적인 시스템 내에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데 왜 나는 전혀 몰랐고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지 납득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허환주 기자는 영화의 모티브가 된 홍수연 양 사건 뿐 아니라 다른 현장실습생의 죽음들을 취재해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홍수연 양의 사건을 보도한 이후 다른 아이들은 이런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허 기자는 "홍수연 양 사건을 보도(☞관련기사 : 자살한 여고생은 '욕받이' 상담사였다 )했지만 이 시스템이 홍수연양 혹은 홍수연양이 다닌 학교에만 국한되는걸까,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 걸까" 궁금했다며 "이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고 했다.
이어 "다른 특성화고, 공고, 상고...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깊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문제가 단순히 홍수연 양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육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권해효 배우는 이 영화가 상영된 시기가 사건이 발생한 시기 즈음인 2017년이 아니라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2023년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유로 그는 '능력주의'가 팽배했던 2017년의 사회를 꼬집었다.
권 배우는 "2017년의 기억을 떠오르면 누군가 만들어낸 '공정사회 담론', '능력주의'가 있었다"며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화 된다고 했을 때 '능력도 없는 것들이 정규직화 된다'던 언론이 큰 목소리를 낼 때"였다며 "그 '능력주의'라는 것에 회의를 가져본다"고 말했다.
이어 "2017년도에 이 영화가 나왔다면 '무능하니까 마이스터고, 상고 갔겠지'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긴 탐사보도와 긴 호흡으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깡' 있는 소희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걸까
상영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20대 초반 예식장에서 노동했다고 밝힌 한 여성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매우 울었다"며 "호프집에 소희가 있을 때 발에 빛이 들어오는데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영화에서 소희는 죽기 전 '가맥집'에 들러 홀로 맥주 두 병을 시켜 마신다. 이 장면에서 소희의 맨발에 햇빛이 드리운다. 그 의미에 대해 정 감독은 "소희의 생전 마지막 날 저물어가는 마지막 햇빛이 차가운 소희의 발에 드리우면 어떻게 될까 생각을 하면서 만든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혹시 잠깐이라도 따뜻함을 느끼고 위로를 받았을까, 그랬다면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라며 "저도 좀 궁금하고 헤아려보고 싶어서 만든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중에 유진(경찰)에게도 똑같이 그 햇빛이 반복될 때, 지금은 죽고 없는 존재(소희)를 쫓아가지만 유진이 그 순간 만큼은 소희의 존재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권해효 배우는 "정주리 감독의 영화를 감탄하면서 봤던 이유는 소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절대 고통을 진열하지 않고, 한 개인의 경험치로 묶어놓는다"며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서 거리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객은 "소희가 깡도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며 "이 사건을 취재하고 영화로 만든 기자와 감독은 소희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벽이나 구조를 느꼈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현장실습' 제도가 개선된 지점이 있는지 질문했다.
정 감독은 "이 영화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이 어떻게 혼자 죽음에 이르는지의 이야기기도 하다"며 "소희가 마지막에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던 소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 것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소희에게는 가족, 친구, 직장 동료가 있었다. 소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핸드폰도 쥐고 있다"며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와중에도 고립되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고 했다. 이어 정 감독은 "(소희의 죽음은) 소희의 성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 좁혀져 오고 마지막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 기자는 현장실습 제도 폐지가 근본적인 해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소희> 영화가 나오고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뜯어보면 현장에서 적용되기는 굉장히 어렵다"며 "특성화고 현장실습 제도는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다"고 했다.
그 이유로 현장실습생의 '애매한' 신분을 꼽았다. 허 기자는 "현장실습생은 학생이면서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부, 교육부 어디 소관도 아니게 붕 떠있는 존재라 제도를 개선하는 게 쉽지 않다"며 "홍수연 양이 사망한 그 해 10월에 같은 현장실습생 신분인 이민호 군이 프레스에 찍혀 사망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스템을 바꾼다고 시민사회단체와 활동가분들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제가 볼 때 크게 바뀐 건 없는 것 같다"며 "현장실습이라는 제도가 없어지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들었으면서"
정주리 감독은 소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경찰 유진 역에 대해 "영화를 본 많은 분들이 현실에는 유진같은 존재가 없어서 판타지라고 한다"며 "현실에 그런 경찰은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그렇고 허환주 기자처럼 그 사건을 처음 취재해서 알리는 분이 있었다"고 했다.
정 감독은 이어 "영화 속 유진도 절망과 답답함을 느끼고 끝이 나지만 영화 밖에 있는 여러분들이 있으니까 변화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며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고 했다.
권해효 배우는 극 중 소희가 처음 자살을 시도한 이후 자신의 부모에게 처음으로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장면을 떠올렸다. 소희의 부모는 소희에게 잘 안 들린다는 듯이 "뭐라고?"하고 되묻는다. 하지만 소희는 "치. 들었으면서"라고 서운해 한다.
권 배우는 이 장면의 대사인 "들었으면서"를 언급하며 "이 사회가 소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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