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이 무너진 자리에, 더 견고한 장벽이 세워졌다

[프레시안books] <미완의 독일통일> 볼프강 엥글러 외, 한울아카데미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사실상 단절됐던 남북관계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당장 치고 받고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 '통일', '평화', '협력', '교류' 등의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민망하고 뜬금없어 보일 정도다.

남북이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실제 어느 한 쪽이 상대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실제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와 같은 통일이 현재의 안보 불안을 해소시켜 줄 확실한 방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남북보다 분단의 역사가 짧고 이미 30년 전에 통일을 이룬 독일이 통일 이후인 2023년에도 여전히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 <미완의 독일 통일>,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 기획, 볼프강 엥글러 외 지음, 한울 아카데미 펴냄. ⓒ한울 아카데미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가 기획하고 볼프강 엥글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를 비롯해 국내외 독일 전문가들이 지난해 11월 말 함께 펴낸 책 <미완의 독일통일 - 독일통일 30년을 돌아보며>(한울아카데미)는 베를린 장벽 철거 30주년 기념식으로부터 독일 통일의 현재 모습을 돌아본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연방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과거의 장벽은 존재하지 않지만 새로운 장벽들, 좌절, 분노와 증오의 장벽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침묵과 소외의 장벽들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서베를린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은 무너졌지만, 통일 이후 독일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장벽, 즉 '머릿속의 장벽'이 세워졌다는 뜻이다.

통일을 했는데 왜 통일 독일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장벽이 만들어졌을까. 엥글러 교수는 통일로 인한 급진적 체제 변화가 동독인들에게 정치적 기본권 확대라는 선물을 줬지만, 이와 함께 사회·경제적 기반이 상실된다는 아픔을 남겼다면서 동독인들이 서독의 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동독인들의 이같은 경험은 극우세력인 '독일 대안당'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고 있다.

공저자인 안성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통일이 서독의 주도 하에 이뤄지면서 동독출신 사람들이 통일 독일의 주인이 아닌 객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동서독 간 심리적 장벽이 생기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체제 전환 과정에서 나타난 노선의 차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나가는 능동적 이행'과 '이식된 체제 내에서의 수동적 적응' 사이에서 생겨난 차이, 한마디로 역사와 개인사에 대한 '자율적 규정'과 '타율적 규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서독의 입장에서는 '흡수'였지만 동독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대한 청산'이었다. 엥글러 교수는 2000년부터 수년간 기민당의 동독지역 연방의원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귄터 누케의 한 인터뷰를 통해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연방의회에서 연설했던 때가 생각난다. 당연히 저는 동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동독을 모르는 사람들은 동독에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략) 포겔 (튀링겐) 주 총리는 이 '동독 카드'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동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국가의 분열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시대정신이 그랬다"

안성찬 교수는 "동독의 과거 청산은 나치 과거 청산보다도 훨씬 철저하게 수행됐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는 "100만 명에 달하는 구 동독 공직자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반인에게 슈타지(Stati, 동독 비밀경찰) 문서 열람을 허용한 조치는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한 과거사를 그대로 노출해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게 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며 "동독의 역사를 '불법국가'의 역사로 규정함으로써 과거 동독에서 살았던 동독 주민들의 삶 전체가 불법국가 안에서의 불법적인 삶으로 부정당하는 결과를 나타냈다"고 분석했다.

서독이 주도한 통일 독일의 '동독 청산'은 특히 경제적 부문에서 강력하게 진행됐고, 이것이 동독인들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엥글러 교수는 동독의 당시 모습을 이렇게 진술했다.

"변화를 경험한 대다수 동독인들은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동독지역의 경제적 벌목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업원 5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150개 중 145개가 공중분해 됐다. 사회적 교류를 위한 아지트가 문을 닫고, 기차는 종종 지나쳐 갔으며, 버스의 배차 간격은 길어졌고, 동독은 그저 지방도시이며 서독에 의존하고 있다는 감정이 만연했다.

(통일 이후) 몇 년 안에 동독은 개인의 삶에 한층 가혹하게 손을 뻗치는 거친 자본주의의 실험 무대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광범위한 경제적 피해와 사회적 배척은 동독인의 경험을 만들었고, 수십만의 사람이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안 교수는 "서독 마르크를 표준으로 한 화폐통합은 동독 기업의 줄도산과 실업자 양산으로 이어져 동독지역의 경제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파멸적 결과를 낳았다. 동독 국유자산의 95%가 서독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동독 주민들 사이에는 "이것은 통일이 아니라 점령"이라거나 "통합이 아니라 식민화"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며 통화의 통합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장벽, 어떻게 없앨 것인가

통일 이후 새로운 장벽이 생긴 독일 사례는 통일 그 자체보다는 양 주체 간 차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김호균 명지대학교 명예교수는 동서독 간 통화 통합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북한 주민을 비롯한 한반도 전체 주민의 생활 수준이 적어도 하락해서는 안된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해야 한다.

북한의 경제가 아무리 낙후됐다고 할지라도 가능한 한 회생시켜 통일 경제에 편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파괴 후 재건'이 아니라 '보존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그것은 비단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북한 주민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다.

스스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하고 기여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그들이 통일을 통해 기대한 생활수준 향상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다 해도 이런 활동이 부분적으로나마 부족함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개인의 참여 기회 확대는 통일 한국에서 남북한 주민 사이의 사회통합을 촉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동독인의 물질적 욕구를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동독 주민의 열망을 통일 과정과 동독 재건 과정에 동원할 수 있었더라면 통일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독인의 자긍심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 낙서가 가득한 베를린 장벽. 서독으로의 흡수 통일 이후 분단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도 관광상품이 됐다. ⓒ프레시안

남한 정부가 이러한 방향으로 북한과 관계를 맺으려면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사실상 이념을 기준으로 갈라져 있는 남한 내에서 이러한 합의를 이뤄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조성복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남한의 정치 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독에서는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동독 정권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지만 남한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북한 정권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승자독식의 '대통령제'도 영향을 미쳤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통일정책이 단절된 것이다.

남한이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인을 가지려면 정부 형태나 권력구조를 변경해야 한다. 한국은 임기가 있는 대통령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 대부분이 매번 교체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통령은 5년 단임이고 외무장관은 그보다 훨씬 더 단명하며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 당대표의 임기는 2년, 원내대표는 1년 단위로 바뀐다.

특정 정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그 정책에 힘이 실리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이는 대외정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상대국과 협상에서 주도적으로 상대방을 선도하거나 교섭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독일의 통일이 책 제목과 마찬가지로 '미완'이고 그 과정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우리가 독일의 통일 과정을 면밀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리적 장벽을 없애고 그보다 더 높은 심리적 장벽을 쌓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머릿속의 장벽'은 통일 이후 체제 전환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독 주민들을 구체제가 만들어낸 기형적 멘털리티의 소유자들이라고 모욕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들이 체제전환의 시작 단계에서 보여준 활력과 자존감을 가지고 미래의 역사를 '자율적으로 함께 규정'하는 역사의 동반자로 다시 올라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엥글러)

* <미완의 독일통일 - 독일통일 30년을 돌아보며>는 중앙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에서 주최한 국내·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여러 학자 및 전문가들의 발표문을 책 형식으로 다시 정리한 단행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다.

국외 : 볼프강 엥글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 / 베티나 에프너 베를린장벽재단 부단장 / 마이케 네도 저널리스트

국내 : 김면회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김영찬 인천대학교 통일통합연구원 객원연구원 / 김호균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 류신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 배기정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 백민아 서울대학교 교육종합연구원 연구원 / 신광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CAU-펠로우 / 안성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 이동기 강원대학교 평화학과 교수 / 조성복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연구교수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