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허락한 '죽음의 보복' …태안 주민은 화합의 길을 찾고 있다

[살아남은 기억들] (7) 태안 민간인학살 사건

태안 민간인학살 사건의 출발지, 사기실재

지난 10월 10일, 영화 <태안>을 보기 위해 태안작은영화관으로 향했다. 전주에서 출발해 두 시간 동안 차를 몰았다. 사실 더 가까운 대전에서도 공동체상영을 했

지만, 그래도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태안으로 갔다. 출발할 때부터 날이 흐렸다. 태안군으로 들어올 무렵에는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영화관(태안문화회관) 바로 뒤편은 백화산 사기실재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지난 뒤에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을 시작으로 한 태안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경찰이 태안에서 후퇴하는 7월 12일 사이, 보도연맹원들은 예비검속되어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가고, 나머지는 오후 5~6시가 지난 시간 태안경찰서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 백화산 자락의 끄트머리쯤인 사기실재였다. <태안민간인학살백서>에 따르면 이 무렵 태안 보도연맹원으로 희생된 민간인은 모두 115명(추정치 포함)이었다.

태안면 고추판매소 창고로 옮겨진 시신들은 모두 불에 타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이 공개되자 가족들과 주민들은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겨드랑이에 남은 헝겊 조각 따위로 구별해 시신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한종은 친구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사기실재로 직접 갔다. 거기서 남아 있는 17구의 시신을 목격했다. 희생자들은 두 명씩 엄지손가락이 철사로 묶여 있었다. 그는 증언에서 시체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다음 총을 쏘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시 말해 총살한 후 시신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을 쏘기 전에 먼저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 태안 민간인학살 사건을 다룬 다큐 <태안> (구자환 감독, 레드무비) ⓒ레드무비

세상이 뒤집히고 보복이 시작되다… 희생자 유가족이 보복 학살에 가담

사기실재의 학살이 일어난 6일 후인 7월 18일, 태안에는 인민군이 들어왔다. 인민군이 들어오니 세상이 뒤집혔다. 죽음의 보복이 시작됐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후퇴하고 수복되는 10월 초순까지 면장을 비롯한 공무원과 대한청년단 같은 우익활동 경력자 및 그 가족 등 다수의 민간인(추정 9명 포함하여 최소 136명)이 희생되었다.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이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경찰과 국군이 아직 들어오기 전인 9월 말~10월 초에는 지방좌익이 학살을 주도하였다.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구금되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비롯해 희생자 유가족들은 학살 과정에서 동참했다.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사람의 형이,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자위대장이 되어 우익계열 주민들을 처형하는 데 가담한다. 하지만 인민군이 후퇴하고 경찰이 다시 들어왔을 때는 그 자위대장의 형과 어머니, 아내가 부역혐의로 살해됐다.

목숨을 잃은 이유는 참으로 가벼웠다. 지역 유지라서, 경찰과 친분이 있어서, 공무원이나 경찰 가족이라서, 이장이 가지고 있던 마을사람들 명단을 없애서, 좌익에게 협조하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수복이 되는 줄 알고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죽기도 했다.

앞서 끌려가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처럼 이들 역시 똑같이 평범한 태안 지역 주민들이었다. 적대감과 증오가 세상을 압도해 버리고 나니 얼마 전까지 한 마을 주민이다. 그러나 집안 갈등이나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도 죽여야 할 사람으로 지목되는 세상이 왔다. 살해 방식도 총살뿐만 아니라 창이나 죽창으로 찌르는 등 매우 잔인했다.

▲ 사기실재에서 당시 사건을 설명하는 강희권 태안유족회 상임이사. ⓒ최규화

재보복에 조직적인 길을 터준 이승만 정부

10월 8일 태안반도를 순회하던 해군 309정이 안흥항(근흥면)에 들어왔다. 당일 근흥면 주민 수십 명이 안흥항 바위에서 해군에게 살해되었다. 근흥면 치안대장이 안흥지서에 구금되어 있는 37명을 보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309정 함장이 왔다.

"지금 무엇하는 거지?"

"흑백을 대별하려 합니다."

"흑백? 흑백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전부 일어서!"

이들은 모두 안흥항의 바닷가 바위 위로 끌려갔다. 총소리에 이어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치안대장이 나중에 가서 현장을 확인해 보니 꿈틀거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안흥항 학살을 시작으로 태안 지역 전체에서 부역 혐의자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읍, 면 단위로 인민군 점령기의 부역혐의자를 색출해냈다. 이들은 경찰서와 지서 유치장, 각 읍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이들의 목숨을 좌우한 것은 경찰, 치안대, 지역유지들로 구성된 '부역자 심사위원회'였다. 여기서 부역혐의자들은 A, B, C 세 등급으로 분류되어 처형되거나 재분류 후 처형 또는 훈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태안지역을 포함해 서산군에서 부역혐의자로 학살된 주민은 최소 1865명에 달했다. 희생자 수만 보면 앞선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나 인민군 점령기에 일어난 학살 사건에 비해 무려 10배 이상 큰 규모다.

경찰은 치안대의 도움을 받아 부역혐의자를 살해했다. 태안면의 경우 치안대는 면, 리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다. 인원수는 치안대장을 비롯해 약 30명이었다. 이들은 부역혐의자를 체포해 치안대 사무실 등에 가두어놓고 혐의를 조사하다가 경찰의 명령을 받으면 혐의자들을 태안경찰서로 이송하였다.

민간인으로 구성된 치안대가 같은 태안 주민 학살 과정에 깊이 개입하였다. 또한 부역자 심사위원회에 치안대와 함께 인민군 점령기의 희생자 유족들이 들어가 활동했다. 정부가 치안대에 주민들을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 좌익세력에 의한 피해 유족들을 부역혐의자 심사에 참여시켰다.

그렇게 보복은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 아래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미 보도연맹원 사건과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을 겪으면서 주민들 사이에 공포와 증오심이 커질대로 커진 상태였다. 이승만 정부는 수복 후 부역혐의자 처벌에 있어 민간인과 그들의 증오심을 이용함으로써 대규모 학살을 불러왔다.

▲ 정석희 태안유족회장. 태안유족회를 창립하고 사건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지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최규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추모제

2022년 11월 15일 태안군청에서 '제72주기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제14회 태안군 합동추모제'가 열렸다.이날 추모식에서 정석희 태안유족회장은 밝은 표정으로 내빈 한 분을 소개했다.

"오늘 각별히 소개해드릴 한 분이 계십니다. 한국자유총연맹 태안지회 함용훈 지회장님입니다. 저희하고는 그동안 여러 번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마는 그동안 대화를 못 했어요. 서로 무슨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다 나라 잘못 만나서, 시대 잘못 만나서 희생당한 가족 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 함용훈 한국자유총연맹 태안지회장님을 다시 한번 소개해 드립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장내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상처를 삭이면서 힘들게, 그러나 용기 있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일까?

영화 <태안>의 구자환 감독은 유족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민간인학살은 좌·우를 떠나 생명존중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태안의 두 유족회가 하나의 추모제를 지내고 유족회도 하나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민간인학살 전체에 대한 국가추념일이 제정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후세대들이 역사 기억과 추모 사업을 한다면 그때도 전쟁과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를 좌익과 우익 두 부류로 나눌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추모제가 열린 날 태안의 14살 소녀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태안 지역 청소년들이 참가한 '영화 <태안> 감상문 대회'에서 태안군수상을 받은 태안여중 1학년 김보미 학생이 단상에 올랐다. 작품명은 <그날의 태안>이었다.

"나의 시각에서 바라본 그 바다는 물이 고우며 항상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바다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에 나의 시각에서 바라본 바다는 처음 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많은 희생자분들이 계실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

▲다큐멘터리 <태안>의 구자환 감독과 출연진들. ⓒ강변구
▲ 태안유족회는 추모제에서 영화 <태안> 감상문 대회에 참가한 태안 지역 청소년들에 소정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강변구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향해 유족들은 평생을 헌신해왔다.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들은 70~90대에 이르는 고령이다. 이제 겨우 진실이 부족하게나마 밝혀지고 있다. 앞으로는 지자체와 시민·지역사회가 추모제를 비롯한 역사 기억을 위한 사업들을 받아 안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제 몫을 해야 한다. 유족회는 태안군에 추모공원 설립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국가의 공식 사과는커녕 지자체 차원의 추모비도 없는 현실이 암담하다. 생명존중과 평화의 가치를 담은 추모비가 태안군민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에 하루빨리 세워지길 마음을 모아 빈다.

※참고자료

위 기사의 태안민간인학살 사건 진행 과정은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작가들, 2018),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서산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서산 태안 부역혐의 희생사건>, <충남 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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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기록관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아카이빙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담은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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