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지키고 무엇은 버릴 것인가, 무엇을 살리고 누구와 손잡을 것인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기후위기시대를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

지난 3년간은 우리가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몸소 그리고 뼈저리게 체험했던 날들이다. 세계화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게 자유로이 이동하는 것은 자본만이 아니라 바이러스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자본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우리의 공장을, 학교를, 놀이를, 만남을 멈추게 할 위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날은 바이러스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기후위기의 시대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개별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인 존재이며, 우리 모두는 '어머니 지구(파차마마)'의 자식이라는 남미 안데스 원주민공동체의 삶의 철학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좁쌀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도 깨치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운명공동체이다.

아마도 나의 남은 인생의 전부는 기후위기시대를 살아야 할 것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위로할 수도 없고, 대안적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결될 사회 문제도 아니다. 기후위기라는 이 거대한 문제는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화두이며, 모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의 공통분모일 수밖에 없다. 농작물 피해, 가뭄과 홍수, 폭염과 화마, 어디서 어떤 꼴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지 알 수 없으니까.

▲ 기후 활동가들은 16일(현지시각) 제27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가 열리는 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서 지구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AP=연합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실천을 보며 항상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심경의 갈래를 쳐보니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첫 번째는 여기에 주범이 있고 악당을 구분할 수 있는 건지, 그것이 과연 정의의 문제로 수렴될 수 있는지 하는 점이다. 기후위기는 비단 자본주의체제 뿐 아니라 자연(지구)에 대한 인간의 관점의 문제, 산업사회와 소비문화가 만든 우리의 생활양식, 그것이 최근에 가속화되었지만 우리의 삶의 터전을 이 꼴로 만든 역사 뒤에는 상당히 깊게 뿌리박힌 이념적, 의식적 경향성이 있을 것이다. 그 문명에 대한 성찰은 참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나 그것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과연 기후위기를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석영은 <불타는 지구를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마농지 펴냄)에서 이렇게 우리를 콕 찌른다. 팜유의 생산으로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현실을 두고 "비난의 화살은 이들 악덕 기업들로만 향해야 하는 걸까? 만일 저 기업들(허쉬, 켈로그, 하인즈, 네슬레, 유니레버, P&G, 펩시코, 마스, 로레알, 존슨앤존슨, 다논)의 이름이 친숙하다면, 당신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실, 팜유는 우리 모두의 '제국적 생활양식'과 분리될 수 없다. 감자칩을, 켈로그 시리얼을, 오레오나 리츠를, 허쉬 초콜릿을, 도넛과 버터를, 라면을 즐기는 한 팜유는 우리의 젖이고 꿀이며 기쁨이다. (중략) 팜유의 생산과 소비를 즐긴 이들 모두가 실은 '열대우림의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면 무엇일까"라고.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가 가장 열악한 삶의 조건에 처한 이들이기에 그들의 삶을 돌보고 위험을 막기 위해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 대립의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과연 성찰의 문제보다 우선이고 우위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생태친화적 삶의 양식을 가장 잘 구상한 사상과 철학은 무엇이고, 가장 잘 실천하는 집단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검약과 검소한 삶의 양식을 구현하며 공존하는 사회를 구상하는 사상은 이미 불교와 기독교 등 종교나 동양사상과 남미 원주민공동체의 부엔비비르(Buen Vivir)가 있었고, 현재 그것을 가장 공동체적 방식으로 실천하는 집단 또한 종교적 기반을 가진 공동체나 원주민공동체들이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은 이런 전통을 재조명하고 현재적 삶에 접목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세 번째는 실천운동의 방향성이다. 기후위기는 모두의 공동대응이 필요한 문제이므로 위기를 직면해서 그것을 부인하지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그 징검다리를 놓을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작지만 확실한 개인적인 실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면서 각성한 기후위기 전사를 양성하는 경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마도 최근에 발간된 <심층적응>(젬 벤델·루퍼트 리드 지음, 김현우·김미정·추선영·하승우 옮김, 착한책가게 펴냄)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심층적응'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은 버릴 것인지, 무엇을 살리고 누구와 손잡을 것인지' 4개의 의제를 제시하며 대화의 장을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운동은, 삶의 변화는 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사회적경제운동은 기후위기를 가장 크고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사회적경제조직들은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윤리적 소비나 상품 생산의 측면에서만 고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그것에 한정해서 활동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소비와 생산을 조직할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등 토론할 지점이 많다. 덜 쓰고 덜 먹고 아끼고 절약하여 이웃과 나누는 탈성장의 길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성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사회적경제는 대안적인 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경제의 폐해만 수습하는 착한기업이 될 뿐이다. 왜 착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이쁨 받으려고!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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