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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자본가와 함께 기후위기의 공범자인가?
유 대표님께
가끔은 뵈었지만 이렇게 글로 뵙기는 처음이네요. 유 대표님을 뵐 때마다 종교 속에 기후의식을 전파하고 이를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키느라 정말 애쓰신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막상 글로 쓰려니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렇네요.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후환경운동에서 제 글은 현실타협적이고 개량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싶네요. 당연히 제 글은 유 대표님의 생각과도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렇더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노동쪽에 몸을 담아 왔던 저로선 유 대표님과 기후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받았던 충격이 적지 않습니다. 가령 "노동자는 생산주의,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기후위기의 공범자가 되고 있다"든지, 전환과정에서 고용의 중요성을 말하는 저더러 "전환사회를 아무런 무리 없이 달성하는 그런 개벽적 전환은 없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말씀들이 그런 거였죠.
체제전환이 필요하다며 탈성장과 생태사회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저로서는 선뜻 공감하기가 머뭇거려지더군요. 사실 기후생태를 말하는 동네에서 체제전환이라는 말은 그냥 일상어가 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암묵적인 공감 사항인 것 같구요. 제가 잘못 이해했나요?
체제전환에 대한 목소리는 높고 때로는 급진적이지만 실천적인 요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더군요. 예를 들어 탈석탄법을 제정하라든지,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고 신규로 건설하는 대신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라는 것을 체제전환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NDC(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상향하고 석탄화력발전소를 조기 폐쇄하라는 게 반자본주의는 아니겠구요. 기후재판을 응원하고 사회책임투자를 장려하는 것, 심지어는 일회용 종이컵 보증금제를 법대로 실행하라는 것부터 기후시민으로서 일상의 소소한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의 활동은 자본주의적이기도 하죠. 어쩌면 기후위기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미온적인 대응이 사고의 수준을 급진화시키면서도 현실적인 요구의 수준을 낮추는 것도 같구요.
탈성장론은 유토피아론이다
제가 언젠가 유 대표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죠. 체제전환이라는 주장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은 전환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하는지도 모호할뿐더러 전환의 경로나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구요. 체제전환을 실천적인 흐름으로 만들려면 다듬어야 할 내용이 많다는 말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탈성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으면 합니다. 길지 않는 지면인데다 아무래도 체제전환 논의는 탈성장을 화두로 시작하는 것 같으니까요.
탈성장 주장이라고 해서 흠집이 없진 않겠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우선은 그것이 노동을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경제성장은 괜찮은 일자리는 물론 대중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린 주요한 엔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를 기후위기의 공범자로 인식하고 고용을 '나 몰라라' 하면서 노동자를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로 세우기는 어렵겠죠. 임금노동은 기본적으로 종속노동이고 고용은 생산의 파생수요라면 노동을 벌레 보듯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대체 일자리가 마련되지 않으면 노동조합은 아무리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일이라 해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맹렬히 들고 일어날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는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된다고 주장하는 나오미 클라인의 말이죠.
저는 탈성장론이 유토피아론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득하게 가물거리는 것 같다는 말이죠.(불가피하게 외부로부터 강제될 수는 있겠지만요)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폐쇄회로에 갇혀 논리적인 자기완결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도 비치구요.
성장중독을 말하지 않더라도 탈성장이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의제일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장기간에 걸친 경기침체나 고용 감소 및 대규모 실업, 생활 수준의 하락을 노동자나 일반 국민이 수용할 것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탈성장이 오히려 불평등을 부추기고 기후위기에 대한 투자를 늦출 수도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이 '혁명'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면 탈성장의 실현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투자란 말이 나왔기에 하는 말입니다만 탈탄소는 탈성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 기본적으로는 화석연료의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일과 함께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재생에너지의 공급을 늘리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달성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는 정부, 그것도 자본주의 정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이러한 투자는 상당한 규모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녹색 경제를 구축하려면 많은 노동 집약적 활동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죠. 녹색성장, 그린 뉴딜을 그린 워싱이라는 한 단어로 치환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탈성장(저성장)이 반드시 탄소배출 감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보더라도 명확하죠. 오히려 독일이나 덴마크에서 보듯 성장과 탄소배출 감축이 동행하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이조차 탄소배출을 개발도상국으로 떠넘긴 탓이라고 주장하시겠습니다만) 오랜 시간에 걸친 정부의 단계적이면서도 강력한 규제와 지원, 그리고 대규모 투자가 뒷받침되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경제성장이 아닐까요.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후위기를 낳는 악당이라는 말에 공감하더라도 "자본주의인가 아닌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떤 자본주의인가?"라고 묻는 게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자본주의를 고쳐 쓸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을 말씀드리는 거죠.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의 확대가 아닌, 이해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하고, 성장에 덜 매달리더라도 평등과 연대를 지향하는, 달리 말해 시장을 사회적 통제 아래에 두는 그런 자본주의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RE 100이나 ESG 경영, 또는 사회책임투자와 같은 기업의 노력이 평가절하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시장주의적 대응이라며 폄하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국가의 규제와 지원, 투자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비판은 정당하지만 자본이 탄소배출 감축에 나서는 것조차 비판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것이 이윤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공동의 차별적인 책임의 원칙'에 비춰 본다면 더 큰 책임이 뒤따라야 하겠지요.
기후운동이 노동조합의 정의로운 전환을 껴안아야
유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노동계는 오랜 기간동안,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정의로운 전환을 자신의 지향으로 삼아왔습니다. 이를 단순히 '먹고사니즘'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이 아닐 뿐더러 사회정의도 아니겠죠. 사회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환경운동이 환경을 지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희생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체제를 바꿔야 기후변화가 멈춘다고 주장하는 조너선 닐의 말이죠, 사실 정의로운 전환은 국제노동기구(ILO)나 국제노총(ITUC)은 물론 많은 노동조합이 수용하는 노동계의 지배적인 담론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지나가듯 "환경운동 하시는 분들은 정의로운 전환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걸 저는 지금도 놀라움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마? 아마도 정의로운 전환을 좁게 해석한 탓이 아닐까, 혼자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정의로운 전환이 권력 관계의 변화를 외면한다든지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죠. 가령 사회적 약자층인 노동자들 - 하청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 - 의 이해를 우선하는 데 동의한다면 이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권력 관계를 바꾸는 것은 물론 불평등의 개선은 불가결한 요소일 것입니다.
가령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이라는 말에서 보듯 노동전환은 산업전환의 내용과 속도에 의존합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도 산업전환 과정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고 이는 권력 관계의 변화를 전제로 합니다. 정의로운 전환을 둘러싼 해석 투쟁이 치열합니다만 그것이 체제전환을 내포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적지 않죠. 당연히 노동계 내에서도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해석 투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이 얼마나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느냐도 평가의 대상이겠죠. 사실 환경운동에서 노동운동이 변방을 차지한다든지 때로는 반환경단체로 비난을 받는 데는 노동운동의 대응이 지지부진한 탓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정의로운 전환을 고용의 보장이나 사회안전망의 확충으로 좁게 해석하면서 막상 기후위기 대응에는 한 발을 뺀 것이 노동운동의 실상이었죠.
기후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일부 업종 - 석탄화력발전이나 자동차 업종 - 에서나 기후위기를 발등의 불로 여길 뿐 대부분의 노동조합에게 기후위기는 강 건너 불이기도 하구요. 내 고용에 영향이 없으면 오불관언이 되고 고용전환이 닥치더라도 내 고용만 해결되면 만사 오케이가 되는 식이었죠. 이른바 현상유지적 대응이나 대응적 담론(reactionary discourse)에 그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노동운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 노동조합주의(social unionism)에 둬야 한다는 주장은 차고 넘칩니다. 사회적 의제를 노동운동 속에 내면화하는 것을 말합니다만 아직도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입니다. 노동권이 제한된 데다 무엇보다 기업별 노조라는 게 질곡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고의 지평을 국제적으로 넓히려는 것만 해도 마치 수영장에서 노는 아이더러 바다를 상상하라고 다그치는 꼴이죠.
행동 주체들의 연대가 없으면 기후위기는 기후파국이 된다
자본주의가 자연에 대한 약탈과 노동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한다면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 역시 노동과 환경의 연대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기후문제로 풀뿌리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수많은 노동자들을 끌여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노동자는 소비자(시민)이자 생산자로서 기후위기의 일차적인 이해당사자인데다 노동자의 자발적인 단체인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 최대의 사회단체라고 볼 수 있죠. 이는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를 세우는 문제이자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봅니다. 노동운동이 기후의식(climate literacy)을 높이는 과정에서 환경단체의 연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실 '환경과 고용 사이의 갈등'은 기후위기와 마주 선 노동조합의 오래된 굴레였습니다. 그걸 해결하자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이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과 환경단체가 접점을 얻게 되죠. 물론 기후연대가 노동과 환경 사이의 만남만은 아니겠습니다만 이 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건 틀림이 없다고 봅니다. 연대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힘을 빌려오는 거죠. 노동조합도 혼자서 소금 가마니를 짊어질 일이 아니듯이 환경단체 역시 노동조합과 동맹을 맺으면 혼자서 세계를 구하려 들 필요는 없어지겠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두의 참여와 협력으로 공동의 행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거죠.
그렇잖아도 바쁘신 유 대표님께 더 바빠지게 여러 질문을 한꺼번에 던진 셈이 됐네요. 길지 않은 만남과 짧은 대화로 제가 유 대표님의 생각을 오해하거나 오독한 지점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거의 담론에 갇혀 미래의 전망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겠구요.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이해의 발판을 넓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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