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2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하는 평화통일시민강좌는 국가보안법, 북한바로알기, 한미관계, 미중전략경쟁, 평화기행을 주제로 4월 16일부터 12월 17일까지 매월 세번째 토요일 오후 3시, 신촌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9월 17일 이시우 이시우 사진가·평화활동가의 강연을 정리한 주요 내용입니다.
1945년 유엔헌장이 만들어졌지만 1950년 한국전쟁까지 유엔체계는 잘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유엔은 지금처럼 커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과 유엔 사무국은 한국전쟁의 기회를 정말 잘 활용했던 셈입니다.
유엔헌장을 만드는 데 직접 참여했던 대표적인 법학자 중에 한스 켈젠(H. Kelsen)이 있습니다. 한스 켈젠은 유엔헌장 작업에도 참여하고 1951년에 유엔헌장 해설서를 썼습니다. 그 해설서 맨 마지막에 부록을 달아 한국전쟁사를 따로 연구합니다. 가장 보수적인 법학자 중 하나로 구분되며 유엔헌장에 관여했고, 미국의 입장을 잘 반영했던 이 법학자의 입장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화의 파괴', 그리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권고'
유엔이 처리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쟁입니다. 전쟁이 발생했을 때, 유엔이 개입할지 말지 결정하려면 두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침략행위'에 대한 정의는 오랫동안 논쟁해왔던 개념입니다. '침략'의 개념은 유엔헌장이 만들어질 때까지도 계속 논쟁이 되었는데, 결국 합의된 정의 없이 유엔헌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74년 유엔총회에서 비소로 '침략'을 정의하였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침략의 정의가 없었습니다.
유엔헌장은 '침략으로 규정되었을 때에만' 군사적 강제조치, 즉 참전이 허용될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미국이 안보리에 제출한 초안에는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었던 이집트 대표가 "침략은 국가와 국가 간에만 성립하는 개념인데, 그렇다면 북한은 국가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었던 미국은 '침략' 대신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두루뭉술하게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유엔헌장에서의 평화란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문제이지 국내문제가 아니므로, '평화의 파괴'로 정의하는 것 또한 유엔헌장의 기본 정신에 어긋납니다.
어쨌든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였으면 그에 따라 조치를 취할 것인지, 권고를 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1950년 6월 27일 안보리 결의는 '평화의 파괴가 구성되어 있으므로 회원국들한테 지원을 권고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엔헌장 39조는 조치를 결정했을 때에만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고 '권고'는 군사력 사용 없이 평화적 해결만 가능합니다.
그냥 해석이 아닙니다. 유엔헌장이 만들어질 당시 이에 대한 굉장한 논쟁이 있었고 그때 브라질 대표가 미국이 '권고'와 '조치'를 나누어서 조문에 넣으니 "권고라고 해놓고 군사력을 발동할 수도 있지 않으냐"라고 질문했고 미국 대표가 답변하기를 "조치를 결정했을 때에만 군사력을 발동할 수 있고 권고라는 단어를 썼을 때는 평화적 해결만 할 수 있다"라고 명확하게 개념을 확정지었습니다.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권고'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16개 국가의 참전은 유엔의 조치가 아니라 각국의 조치일 뿐입니다. 때문에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 "유엔사" 모두 '유엔'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습니다. 6월 27일의 유엔 결의를 볼 때, 어디에도 유엔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습니다.
미국통합군사령부에서 "유엔사령부"로 둔갑
6월 27일 결의가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7월 7일, 각 나라가 보낼 군사력의 사령부를 창설하기로 한 내용의 결의안이 통과됩니다. 그러나 7월 7일 통과된 결의안을 보면 그 어디에도 '유엔사령부'를 창설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미국통합사령부'를 창설한다는 것입니다.
1950년 7월 7일 결의 당시 다른 나라들은 유엔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동원하기로 한 결의이므로 "유엔사령부"라는 명칭을 쓰자고 제안하지만 오히려 미국이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야전교범(FM:Field Manual)에 따르면 미군은 절대 다른 나라 사령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엔사령부"가 만들어지면 잘못하다간 미국 사령관이 아닌 다른 나라 사령관의 지휘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미 합참이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유엔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결의안은 '미국통합사령부' 창설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7월 25일 도쿄에서 "유엔사령부"를 창설했다는 미국 정부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통합사령부가 "유엔사령부"로 갑자기 둔갑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미국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94년 6월 유엔사무국법률과는 <유엔법률백서>의 '주한유엔사의 상태'란 글에서 '유엔사' 명칭이 "잘못된 이름"(misnomer)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모두 다 알지만, 우리만 모르는 '유엔기 사용의 불법성'
7월 7일 안보리 결의는 유엔 깃발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사령관한테 부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통합사령부건 "유엔사령부"건 간에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면 그것이 "유엔사령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 깃발 사용을 승인한 것 자체가 유엔 법률 위반입니다. 유엔 깃발법이 있습니다. 유엔 깃발법에 따르면 군사작전에서의 유엔기 사용을 승인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가진 기구는 오직 유엔사무총장뿐 입니다. 때문에 유엔 안보리의 1950년 7월 7일의 유엔 깃발 사용 승인은 불법입니다.
전쟁이 이미 났고 법을 따르고 안 따르고가 뭐가 중요하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유엔기 사용 승인은 안보리의 월권행위입니다. 유엔안보리가 불법을 저지른 것입니다.
1993년 12월 24일 유엔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Boutros Boutros Ghali)는 판문점에서 자신은 "유엔사"에 유엔기를 게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언급했으며 유엔사무국법률과의 1994년 6월 13일 자 각서에 "대한민국에서 유엔기의 게양은 유엔 활동이나 프로그램과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리 결의84(1950)의 잔재"라고 명시했습니다.
1950년 안보리 결의 84호(7월 7일 결의)가 통과된 후 유엔사무총장이 맥아더에게 유엔 깃발을 보내고 7월 17일 유엔사무총장의 개인 대표가 한국 지상전의 작전통제권을 가진 미8군 사령관에게 유엔 깃발을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와 같이 유엔 깃발법과 충돌한다고 유엔이 법적 해석을 발표했습니다.
더구나 가짜유엔사해체국제캠페인이 국제 민변을 통해 제출한 문제제기 질문서 이후 1년 만에 유엔사무총장은 유엔기법을 개정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유엔사"의 유엔기사용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유엔은 유엔의 조치로 "유엔사"가 만들어진 적이 없으며 한국에 있는 "유엔사"는 유엔의 조직이 아님을 명확하게 명시하였습니다.
유엔 사무국은 1994년 당시 부트로스 사무총장 명의의 공문을 유엔 북한 대표들에게 보냈고 코피 아난 사무총장도 똑같은 공문을 보냈으며 반기문 사무총장은 대변인 명의로 같은 내용의 공문을 유엔 북한 대표부에 보냈습니다.
"유엔사"와 유엔 깃발 문제는 이미 유엔에서도 그냥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만 모르고 오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유엔헌장은 일국이 마음대로 유린할 수 없습니다. "유엔사" 창설 문제가 유엔헌장을 유린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유엔사" 문제는 한국주권과 충돌하는 문제와 함께 유엔헌장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유엔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유엔헌장의 제대로 된 운영을 논할 수 없습니다. 유엔의 핵심 의제가 된 것입니다.
유엔은 점령통치를 할 수 있는가?
2018년 4.27 판문점선언 이후 "유엔사"가 남북교류를 허용하지 않는 사례들이 생겨났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엔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유엔사"와 한국주권의 충돌은 1950년 10월 12일에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넘어간 것은 유엔에서는 안보리 위반이었으므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6월 25일, 27일 결의는 38선 이남에 대한 무력공격을 격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혈맹이었던 영국은 38선 이북으로 넘어가려면 새로운 안보리 결의를 채택하던지, 아니면 38선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국은 확전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미국과 영국 사이에 외교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또한 안보리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소련이 8월 1일부터 안보리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장일치제를 택했던 유엔안보리에서는 이제 한국전쟁에 대한 결정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38선 이북으로 군대가 진출해 있었고 곧 압록강까지 점령하게 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안보리가 아닌 유엔총회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안과 10월 12일 언커크임시위원회 결정에 따라 미국은 38선 이북지역 점령 시 '유엔사령관'이 통치의 주체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헌장에 따르면 안보리가 어떤 사태의 결정을 하고 그 사태의 결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유엔총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안보리 결의가 시작되었고 10월에도 여전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유엔총회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유엔총회를 동원하여 결의를 통과시킨 것입니다.
유엔헌장에는 유엔이 어떤 나라에 들어가서 점령을 하고 통치를 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고 이것을 관행화시켰습니다.
이 결의는 유엔 역사상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잠복해 있다가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코소보, 캄보디아, 중앙아프리카, 유고슬라비아에 유엔 평화유지군이 들어가 점령과 통치를 했습니다. 유엔평화유지군의 사령관은 거의 미군입니다.
결국 미국이 유엔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가 점령통치를 하고 총선을 통해 대통령을 뽑아 대리정권을 세우는 것까지 합법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시작이 1950년 10월 7일의 결의입니다.
언커크(UNCURK) 창설과 한국전쟁 당시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점령통치권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결의에 의해 언커크 (UNCURK: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단)를 창설하고 뉴욕에서 한 달 정도 조직작업을 거쳐 한국에 들어옵니다. 언커크가 조직되고 있던 당시 한국은 이미 맥아더에 의해 압록강 부근까지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언커크 창설준비를 위한 임시 위원회는 10월 12일 "유엔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의 통치와 민사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이 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한다는 결의를 내렸습니다.
이는 언커크 도착 전까지 한 달 정도 과도기 임무를 부여받은 임시 위원회의 내부결정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총회결의를 넘어서는 월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유엔사"가 이북에 대한 점령통치권을 가진다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38선 이북입니다. "유엔사"가 한국 정부에 보낸 공식 문서에 따르면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은 유엔사 점령지로 통보하고 있습니다. "유엔사규정"525-2에 의하면 "대성동은 유엔사가 설립한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북한지역을 한국정부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사령관"이 총독이 되어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미연합연습 작전내용은 북한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인데 이것의 근거가 1950년 10월 12일의 결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엔사"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그런면에서 "유엔사"는 우리 헌법에 완전히 위배되는 반국가단체입니다. 형법의 내란죄는 국헌을 문란하려는 자로, 폭동을 일으킨 자입니다. 이때는 폭동을 일으켰을 뿐 새로운 정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법에서는 폭동을 일으킨 자가 처벌 대상입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2조는 국가 변란자를 처벌하게 되어 있고 국가 변란이란 폭동을 일으켜 내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정부를 참칭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국가보안법이 훨씬 강도가 높습니다. 그런데 "유엔사규정"551-4에 의하면 자기들을 점령자로 보고 있고 한국 영토의 일부를 한국 허락 없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 점령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법적인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유엔사규정"525-2는 대성동 민사행정에 관한 규정입니다. 이 규정의 마지막 부분에 민사행정을 정의하고 있는데 적군과 아군지역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북한지역에 대해서는 토착 민간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외국 정부, 즉 미국이 행정, 입법 및 사법권을 행사하기 위해 수립하는 행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군지역에 대해서는 현지정부와의 합의 하에 현지정부가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특정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외국 정부가 수립하는 행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가 "유엔사"와의 합의하에 특정권한을 이양했다면 그에 대한 조약이나 협정이 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법적 근거없이 "유엔사"가 대성동에 대한 점령권과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를 참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낯선 이 개념이 법적으로는 완벽한 불법을 구성하는 개념입니다.
"유엔사령부"가 1950년 10월 12일 결의를 고집하는 순간, 이런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10월 12일 결의는 이미 무효가 되었습니다. 언커크 결의에 따르면 언커크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만 "유엔사령부"에 위임하기로 되어 있고 언커크가 한국에 도착한 1950년 11월 26일 그 즉시 "유엔사령부"에 위임했던 이 점령통치권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언커크는 1973년 유엔총회에서 완전히 해체됩니다. 그 권리의 근원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1973년에는 "유엔사"의 통치권은 끝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유엔사"는 1950년 10월 12일 근거로 이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군사분계선 통과 권한은 "유엔사"에 있는가?
얼마 전 북한 어부를 판문점을 통해 보냈다는 것에 대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전협정 7항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권한은 군사정전위원회에만 있습니다. "유엔사령관"은 군사분계선 통과에 대한 권한이 없습니다.
정전협정 8항을 "유엔사령관"의 비무장지대 출입허가권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이는 비무장지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허가권입니다. 진입이 아닌 진출허가인 것입니다.
"유엔사령관"의 권한은 민사행정집행을 위한 인원수를 결정하는 것뿐이고 정작 민사행정을 감독하는 민사행정경찰은 군정위가 결정합니다. 이북어민송환문제는 "유엔사령관"의 민사행정업무가 아닌 남북 당국 간 외교업무입니다.
결과적으로 군사분계선 통과 자체는 "유엔사령관"에게 아무런 허가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는 1994년에 해체되었습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인민군 정전위원회와 "유엔사군사정전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북한에서 인원을 철수시키면서 자동으로 해체되었습니다.
혹자는 "유엔사군사정전위원회"는 남아 있으니 반쪽은 남아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계약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한쪽이 계약을 파기하면 그 계약은 없어지는 것이지 절반만 유효한 계약은 없습니다. 때문에 "유엔사군사정전위원회" 군정위산하기구가 아니라 "유엔사"기구일 뿐입니다.
정전협정 대안인 9.19 남북군사합의
정전협정은 한국이 서명하지 않았고 당연히 비준되지 않았기에 한국법률이 된 적이 없습니다. 국내법이 아니기에 그 위반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단지 정전협정 이행에 협조를 해왔을 뿐입니다.
정전협정이 법적지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 피해에 대한 구제도 받을 수 있어야 할텐데 정전협정 때문에 일어난 피해에 대해 한국 법률에 따라 구제받을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헌법재판소에서 다룰 수 있는지 따져보았지만 헌법재판소는 관할 범위가 국내 공권력기관이고 "유엔사"는 국외기관이므로 한국 법률 체계에서 "유엔사"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 법률가의 해석입니다.
남북정전협정의 성격을 갖는 9.19남북군사합의서는 두가지 점에서 획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9.19남북군사합의서는 '정전협정에 따라'라는 문구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1990년 남북기본합의서, 10.4선언은 모두 '정전협정에 따라'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유엔사"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9.19 군사합의 직후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미국과 상의 없이 군사합의를 체결했다며 강경화 외교장관에게 항의전화를 했습니다.
둘째, 다른 남북합의서들과 달리 9.19남북군사합의서는 비준동의되어 대한민국전자관보에 공포됨으로서 국내법령으로 발효되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9.19군사합의를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불법이 됩니다. 9.19군사합의는 이전의 합의들과 완전히 성격이 다릅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에 대한 규범은 정전협정과 9.19 남북군사합의서가 병존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대립·충돌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렇게 되자 "유엔사"는 비무장지대를 통한 남북교류협력을 노골적으로 막았습니다. 그전에는 "유엔사"가 남북교류를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유엔사"의 간섭없이 남북이 합의하여 실행할 수 있는 '서해평화수역'
9.19군사합의는 부분적으로 작은 남북연합을 실현할 수 있는 합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육지비무장지대는 평화지대를, 한강하구는 남북공용수역을, 서해5도에는 평화수역을 만들기로 한 것이 그것입니다. 육지, 한강하구, 서해순으로 "유엔사"관할권이 축소됩니다. 서해에는 "유엔사" 관할권이 아예 없습니다. 서해는 지금 바로 작은 남북연합을 만들 수 있는 곳입니다.
9.19군사합의서 붙임4는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평화수역을 설정하기로 하고 출입절차를 정했습니다. 이 평화수역은 공동어로수역이므로 남북공유지가 됩니다. 남북 간 신뢰는 선의와 최선을 기준으로 해야 하지만 제도를 설계할 때는 선의보다 악의를, 최선보다 최악을 기준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
1968년 하딘(G. Hardin)의 "공유지의 비극"이란 논문이래 공유지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 정착되었고 남북공유지도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10년 오스트롬(E. Ostrom)은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라는 책을 통해 공유지비극을 해결할 수 있는 공유지관리이론을 만들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합니다. 이 책이 연구한 1000여개의 성공사례 중 터키 알라니아 공동어장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1970년 이전 이 어장은 공유지비극이론의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폭력과 갈등, 과다경쟁으로 인한 조업비용증가로 모두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지역조합원들이 조업구역을 배정하는 새로운 운영규칙을 실험·안착시킴으로서 비극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때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지역조합이 자주적으로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관할권을 법률로 부여한 것입니다. 또한 준사법적 성격의 자율감시활동권한도 부여했습니다. 사법권과 입법권을 어느정도까지 부여할 것이냐가 공유지관리제도의 핵심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9.19남북군사합의에 따르면 평화수역에 5일 동안 체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공동어로구역에서는 남과 북의 어민들이 직접 잡은 물고기를 그 자리에서 교환할 수 있도록 바지선을 띄우고 파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임시상가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체류는 거주가 되고 거주는 주소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공동경제구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남북의 지방자치법이 부분개정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남북어민들이 공동규칙을 제정할 수 있도록 입법권을 부여하는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섬이니까 남북의 다른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높은 수준의 입법자율권을 부여하는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수역에서 남북어민의 공동어로활동이 큰 기대를 받으며 시작되겠지만 두 단계의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첫 번째 위기는 범죄문제입니다. 개성공단 폐쇄직전 이 문제가 예상되었을 때 준비한 대안은 '법질서유지대'로, 일종의 자율방법대 운영 같은 것이었습니다.
평화수역에서 예상되는 질서유지, 치안 등 준사법적 문제에 대해 9.19남북군사합의는 이미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남북해경으로 이루어진 공동순찰대를 꾸려 평화수역의 공동어로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합의가 최종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여 남북 경찰이 자기중심으로 지휘하려고 싸울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비로 이같은 남북 준사법당국 간의 충돌입니다. 남북 각자의 법령을 적용할 수 없기에 치안 등 준사법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동법령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남북이 개헌하지 않고 입법권을 부여할 순 없기에, 이 수역에만 특별하게 적용되는 공동입법권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분적이라도 입법권이 부여된다는 것은 이곳이 작은 연방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연방
6.15남북공동선언에는 낮은 단계의 연방과 국가연합이 공통점이 있고 이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합의했습니다. 낮은 단계의 연방이란, 남과 북이 외교권과 국방권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나머지 권한은 각자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은 단계의 연방도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려면 남북군대가 공동으로 작전계획을 짜고 공동군사연습을 해야 합니다. 남측출신 통일대통령이 인민군에게 연방군으로 편재되라고 명령했을 때 그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북측출신 대통령이 국군에게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남북 사이에 고도의 신뢰가 쌓여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남북연합은 유럽연합처럼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치고, 남북연방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구상엔 남북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 사이에 중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이에 '작은 연방'을 설정하자고 주장합니다.
서해평화수역에 만든 파시에 행정권에 이어 준사법권이 부여되고 제한적이지만 입법권까지 부여되면 작은 연방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 성공과정을 지켜보며 작은 연방의 범위를 확대해 갈 수 있습니다.
평화수역에 이어 백령도와 기린도로 범위를 넓히고 서해5도에 이어 한강하구공용수역과 서해의 경계점인 말도 서쪽에 9.19합의에 나온 선박통행검사소를 남북이 공동으로 만들 때까지는 "유엔사" 간섭없이 남북합의만으로 작은 연방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한강하구와 비무장지대부터는 "유엔사" 관할권을 단계적으로 이양받아야 합니다.
정부가 이것만 결단하면 한강하구공용수역, 비무장지대내 평화지대까지 작은 연방이 확대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실험을 제주에서 시작했습니다. 제주도는 제주특별자치도입니다. 제주도는 고도의 입법권까지 부여하는 것을 상정하여 국제자유도시를 조성할 목적으로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입법권이 부여된다는 것은 제주도의회가 아닌, 제주도에 작은 국회가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제주도에는 아직은 미약하지만 한국 최초로 자치경찰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치안을 비롯한 준사법기능의 요구는 제주특별차지도가 직면할 첫 번째 고비입니다. 이를 넘어 두 번째 고비에서 제한적이나마 입법권이 부여되면 제주특별자치도는 연방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충분한 논의가 부족하기는 했지만 강원도도 특별자치도가 되었습니다. 현재 경기도도 경기북부를 특별자치도로 하겠다는 시동을 걸었습니다. 만약 인천시가 인천 특별자치시로 시동을 걸면 접경지역 3개 지방정부가 입법권을 가진 특별자치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연방이라 하면 꿈같은 이야기 같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은 신의주 특별행정구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입법권을 부여한 상태입니다. 남북 모두 자체 내에서 연방으로의 이행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9.19남북군사합의 실행을 위해 "유엔사"의 간섭 없이 남북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한 걸음씩 내디디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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