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식량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기후위기와 전쟁] ③ 윤병선의 <농민권리: 유엔 농민권리선언의 이해>

소농 가족농을 없앤 공산주의 러시아, 식량부족으로 붕괴되다

공산주의 소비에트연방이 저지른 가장 큰 비극의 범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 즉 약 1억 3500만 명(1910년 총인구 1억 5800만 명)의 소농 가족농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 가운데 1945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4000만 명의 소농들이 부농 숙정과 집단농장화, 전시 공산주의의 궁핍 등으로 죽고 사라져갔다. 쿨라크(부농) 숙청의 대상은 대부분 미르 농업공동체 내의 약자였던 과부, 장애인, 극빈농들이었다.

러시아의 미르공동체는 러시아 농민들의 자치공동체였다. 미르공동체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 1840년대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은 이같은 미르공동체 소농들의 자치와 협동이야말로 사회주의의 현실태로서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농본주의의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80년대에는 미르공동체를 인민주의 공동체 삶의 전형으로 미화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연과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벌이는 보나르도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농민공동체를 해체하고 모든 농민들을 집단농장의 농업노동자로 만든 공산주의 혁명은 이데올로기의 광기와 편협성을 생생하게 실증하는 교과서였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2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농업의 방향을 둘러싸고 이른바 차야노프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농업부차관을 역임하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V. 차야노프(1888~1931)는 농업의 생산성은 소농 가족농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증 사례 연구를 통해 이를 입증하면서 농업의 집산화 방식과 맑스의 농업에 관한 거의 모든 이론을 비판했다.

그는 소농 가족농이 세상을 먹여 살린다고 주장하며 소농 가족농 중심의 농민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꾼 농학자이자 실천가였다. 그가 1920년에 출판한 󰡔나의 형 알렉세이의 농민 유토피아 여행기󰡕는 공산주의 혁명이 급속하게 추진되고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에서 소설 형식을 빌어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 보기 드문 책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1929년 12월 27일 연설에서 자야노프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공격했고 차야노프는 그 직후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는 수용소에서 10년을 더 살다가 1939년 5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녹색평론> 163호, 앨런 칼슨의 '차야노프와 '농민 유토피아')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차야노프가 예견한대로 집단농장의 극심한 비효율과 낮은 생산성으로 대규모의 비옥한 농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로 식량을 수입해야만 하는 세계 최대의 식량수입국으로 전락해버렸다. 급기야 농업전문가였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구소련은 1991년 크리스마스에 식량부족으로 나라 자체가 소멸해버렸다. 그럭저럭 일하는 시늉만 해도 배급이 나오고 월급이 나오는데 어떤 농업노동자가 농사일을 열심히 하겠는가.

그러나 차야노프의 소농 가족농 이론은 그 뒤 농업을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농본주의를 실천하는 농민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농민단체인 비아캄페시나를 비롯하여 소농 가족농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차야노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농민과 공동체를 해체시킨 자본주의, 기후위기-식량전쟁으로 붕괴될 것

공산주의 러시아가 농민과 공동체를 해체시킨 것과 똑같이 자본주의 또한 농민과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있는 중이다. 차이점이라면 공산주의가 권력의 힘으로 순식간에 소농 가족농을 소멸시켰다면, 자본주의는 자본의 힘으로 야금야금 천천히 긴 시간에 걸쳐 고사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세계 농업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다. 국제 곡물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이들과 국제 투기자본에 의해 2007/2008년의 세계 식량위기가 발생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오직 최대이윤이 목표인 기업농 체제는 이른바 ‘녹색혁명’이라는 이름의 석유농업을 통해 저개발국의 토지를 약탈하고 있다. 단기간의 고수확을 위한 화학비료와 농약 투입으로 토지를 죽이고 인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 최대의 개인 농지소유주이기도 한 빌게이츠가 자신의 빌게이츠재단을 통해 지금 현재 아프리카에서 벌이고 있는 녹색혁명 사업이 바로 그런 일이다. 이같은 자본주의의 규모화, 기계화, 화학화된 산업농업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시꺼먼 살인 약탈농업이자 지속불가능한 농업이다.

오죽하면 농산물 자유무역의 나팔수 역할을 하던 세계식량농업기구(FAO)도 2014년을 '국제 가족농업의 해(international year of familyfarming)'로 정하면서 기업농 중심의 농업에서 가족농 중심의 농업으로 중심 이동을 꾀했겠는가. 이를 전환점으로 2018년 12월 유엔총회는 농민 권리선언을 채택하였다.

윤병선의 <농민권리: 유엔 농민 권리선언의 이해>(한국농정, 2022)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라는 관점에서 이같은 농업-농민의 현실과 농민권리선언의 세부 내용을 밀목요원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인간과 사회, 국가의 대규모 계획, 개발과 성장 계획은 대부분 실패한다.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리우데자네이루 해안에서 1000km 떨어진 황무지에 단 5년만에 건설한다는 계획은 도로, 광장, 주거지역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애초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6만명의 건설노동자가 거주할 공간에 대한 계획이 애초부터 없었다. 노동자들은 건설 공사가 끝난 뒤에도 도시 주변부에 남아 살고자 했고, 브라질리아는 무계획의 도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자본주의 산업화의 성장과 개발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고 실패해가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 산업화의 개발과 성장 계획에는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는 아예 개념조차 없었다. 특히 자본주의의 산업농업은 더더욱 그렇다. 기후위기와 함께 물부족, 지력 감퇴 등으로 인한 식량위기는 조만간 성장과 개발 자체를 무로 돌려버리고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며 사회와 국가를 붕괴시키고 말 것이다.

숲이 사라지면 생명체도 사라진다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 사막을 보면서 울창한 숲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약 50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 우프라테스 강 지역은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다. 이 울울창창한 숲을 기반으로 인류 최초의 도시국가인 수메르가 건설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농경지를 만들었다. 수메르인들의 에너지원은 숲의 나무였다. 나무로 밥을 해먹고 나무로 그릇과 칼, 연장, 무기를 만들었다. 나무로 집과 거대한 사원을 짓고 나무로 배를 만들어 멀리 인도에서까지 사치품들을 들여왔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숲을 파괴하고 건설한 문명이 생태적 재앙을 초래하면서 몰락할 것임을 슬프게 증언하는 예언서이기도 하다.

숲이 사라지면 기후가 바뀌고 가뭄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서사시를 쓴 사람들은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국가 왕과 지배자들의 탐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지 않은 수메르의 농토 또한 빠르게 염화가 진행되면서 농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수메르 인들은 점점 더 먼 곳에서 나무를 들여와야 했다. 결국 수메르인들은 사막으로 변해가는 자신들의 도시국가를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수메르 이후에 우르, 라가시 등등의 도시국가들 또한 차례로 똑같은 방식의 흥망성쇄를 반복했다.(<숲의 서사시>(존 펄린 지음, 송명규 옮김, 따님 펴냄)

오늘날 사막 한 복판에 폐허만 남은 수메르 도시국가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밀림조차 이제 거의 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버리고 어디로 사라질 수 있을까.

멈추고 이웃을 보아야 생존의 길이 보인다

가톨릭의 수도회에는 스타치오(statio)라는 멈춤과 묵상의 공간이 있다. 붓다는 멈추고 성찰하는 수행(위빠싸나, 止觀)을 삶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팔정도의 하나로 중요하게 가르쳤다.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멈추는 것은 마음만 먹는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립의 삶이 아니면 노예의 삶이다. 사회성 동물인 인류는 가족과 사회, 국가 공히 더불어 함께 하는 자립의 삶, 특히 자연과 공존하면서 지속가능하게 식량과 에너지를 자립하는 삶을 만들지 못하면 죽거나 아니면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날 월가의 금융 마피아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삶은 부채의 삶, 노예노동의 삶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부채와 노예노동의 쳇바퀴에 갇혀 구조화된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삶을 강요당한다.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인 협동과 우애 대신 무한 경쟁의 논리를 내면화시키도록 교육받는다. ‘부자되세요’가 아무 거리낌없이 선전되는 돈에 대한 탐욕의 삶을 가장 가치있는 삶으로 당연시한다. 그러면서 노예소유주인 금융마피아의 개발과 성장 세계관, 탐욕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게 된다. 사실은 금융마피아 자신들도 탐욕의 세계관에 매달린 노예이긴 매한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세계관과 삶이 기후위기의 진짜 주범이다. 그리고 조만간 소멸될 수밖에 없는 자살의 세계관과 삶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는 행위야말로 삶의 전환, 삶의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삶이자 지속가능한 생존의 길이라 하지 않으르 수 없다.

인민들 하나하나가 탐욕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는 체제 전환의 문을 여는 마중물이다. 그리고 앞만 보고 달리던 발을 멈추고 땅과 하늘을 보고 옆에 있는 가족과 이웃을 보는 일은 노예의 삶에서 탈출하는 첫발자국이다.

수많은 인민들이 신용카드를 버리고 은행 현금을 찾아 협동의 신용기구를 따로 만든다면 그때 비로소 금융 마피아들의 바벨탑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농토를 파헤치던 개발과 성장의 불도저도 멈추기 시작한다.

돈벌이 농업이 아닌 생명과 생존과 농업 

상식의 눈으로 보면 기후위기가 우리의 삶에 떨어뜨리는 핵폭탄은 다름아닌 식량전쟁이다. 곡물자급율 20%도 안되는 한국의 현실은 바람 앞의 등잔불보다도 더 위험하다. 식량위기는 이미 현재진행형의 재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등지의 기후난민 사태는 다름아닌 기후재난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 원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세계에 걸친 식량위기가 가시회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식량이 부족할 때 인민들이 어떻게 생존의 길을 모색했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을 보여준다.

구소련 멸망 뒤 국가의 배급이 끊겨지자 러시아 도시 주민들은 ‘다차’라는 도시 근교 텃밭에 스스로 감자를 비롯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했다. 스스로 농민이 된 덕분에 식량을 수입하지 않고도 러시아 인민들은 굶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노예 수유주인 전체주의 국가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이 독일군의 공격과 공습으로 식량공급 체계가 무너졌을 때도 런던 시민들은 스스로 농민이 되어 집 앞과 도시 곳곳에 도시텃밭(gardening)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이같은 승리를 위한 경작(Dig for Victory) 덕택에 시민들은 굶어죽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 도시 주민들이나 런던의 시민들이나 이웃과 농민들과 함께 씨앗과 농사 정보를 나누는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스스로 형성하면서 말이다. 농민이 아니더라도 도시에서 지금 이 순간 스스로 농민이 되어 텃밭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식량위기를 대비하는 최선책이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의 석유공급 중단으로 석유농업을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북한과 쿠바의 서로 다른 대응은 자립자치 공동체가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쿠바의 도시지역 인민들은 바리오(barrio) 지역공동체의 이웃들과 힘을 합해 국가의 땅이건 뭐건 빈 땅에 닥치는대로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쿠바의 자립자치 공동체인 바리오는 해체되지 않고 살아 있었고 인민들은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인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줄 수 없었던 쿠바 정부는 인민들의 선택과 이런 도시텃밭 인민들의 자립 농사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쿠바는 적어도 대규모 아사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이 이제나저제나 언제 배급을 줄지 기다리다 굶어죽고 말았다. 인민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발휘될 수 없는 수령 중심의 국가 체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제 전환기에 생사를 가르는 것은 다름아닌 자립자치의 마을공동체와 주권자 이웃 민주주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농업에 대한 세계관의 전환이 생존의 지름길이다. 가격이 떨어졌다고 벼를 불태우는 행위는 농부의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은 오직 돈을 향한 탐욕의 마음일 뿐이다. 월가 금융마피아의 개발과 성장 세계관과 똑같은 세계관이다. 생명과 자연순환의 농업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생존의 주춧돌이다.

우리는 자연을 신용카드처럼 마구잡이로 긁어 쓰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제일이 다가오고 있다. 신용카드를 버리고 자연과 생명 순환 농업으로의 전환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생존의 길이 아닐까.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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