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9월 8일자로 채택한 최고인민회의 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부분을 뽑아본 것이다.
북한은 이 법령의 '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에서 "국가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체계가 적대세력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는 경우 사전에 결정된 작전방안에 따라 도발원점과 지휘부를 비롯한 적대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한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고 밝혔다.
또 '핵무기의 사용조건' 가운데 하나로 "국가지도부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되었거나 임박하였다고 판단되는 경우"도 명시했다. 이밖에도 북한은 다양한 조건에서 핵무기 사용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핵무기 사용조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이를 공개한 것은 미국 등 다른 핵보유국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특히 북한은 "임박했다고 판단한 경우"를 여러 차례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유사시 핵전쟁의 위험을 높이는 측면이 있다. 임박했다는 판단에는 오판과 오인의 가능성이 따라다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정보자산이 낙후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죽은 자의 손(Dead Hand)' 독트린을 법제화하고 이를 공개한 것은 더욱 눈에 띤다. 이는 한국, 혹은 한미동맹 차원에서 거론되어온 '참수작전'에 대한 맞대응의 성격을 갖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부터 북핵 대응 계획에 포함된 참수작전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 징후가 보이면 승인권자를 제거해 핵 공격을 막겠다"는 취지를 품고 있다.
이 작전은 박근혜 정부 때 주로 거론되었지만, 그 능력은 문재인 정부 때 본격적으로 구비되기 시작했다. 2017년 12월에는 유사시 북한 전쟁지도부 제거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임무여단'이 창설되었고, 참수작전의 핵심 전력으로 일컬어져온 F-35A도 2019년부터 본격 도입되었다. 또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참수작전이 한미군사훈련이 포함되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핵무기가 떨어지면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에, 유사시 그 명령권자를 제거해 핵공격을 막겠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자기보호 본능'에 해당된다. 그러나 안보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참수작전은 당연히 '적국의 공격에 우리 지도자가 제거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상대방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 내 일각에서 참수작전이 거론되자 소련은 '페리미터(Perimeter)'를 입안했다. '죽은 자의 손'으로도 불린 이 작전은 소련의 지도자가 적국에 의해 제거될 경우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대규모 핵 보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북한의 핵 독트린은 이와 판박이인 셈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되었던 '페리미터'는 1990년 들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 페리미터 작전 장교로 근무했던 소련의 발레리 야리니치가 미국의 전직 전략사령부 사령관에게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야리니치는 '죽은 자의 손'을 비밀로 유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봤다. 미국이 이를 알고 있어야 위험천만한 참수작전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북한이 소련의 페리미터와 동일한 독트린을 법제화하고 이를 공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에서 전형적이고도 위험한 안보딜레마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남한이 북한의 핵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참수작전을 고안하자, 북한은 남한의 참수작전을 억제하기 위해 공세적인 핵 독트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는 유감스럽지만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필자는 졸저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2020년, 유리창)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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