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차례차례 내려놓으면 크게 쏘겠다.' 윤석열 정부가 8.15 경축사를 계기로 내놓은 '담대한 구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본 것이다. '판돈을 키워봐야 소용없다.'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18일 내놓은 담화의 요지이다. 이게 남북관계의 씁쓸한 현주소이다.
먼저 북한은 크게 달라졌는데, 윤 정부의 담대한 구상은 '과거의 북한'을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담대한 구상은 빈곤한(혹은 빈곤하다고 믿고 싶은)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과 협력을 제시하면 북한이 비핵화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과거에도 핵 포기를 '경제적 흥정물'로 간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근 경제 사정도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도 제재를 상수로 두면서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한 상황이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핵포기하면 잘 살게 해줄게'라는 접근은 연목구어와 같다.
물론 윤 정부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고 강조한다. 북미관계 정상화를 외교적으로 지원하고 재래식 군축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즉 북한을 무력이나 압박으로 붕괴시키는 시도도 하지 않겠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북한이 북미관계 정상화를 간절히 원했던 시기는 지났다. 길게는 1990년대 초반 이래, 짧게는 2018-2019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당시까지 북한의 핵심적인 목표는 북미관계 정상화였다.
하지만 세 차례에 걸친 북미 정상 간의 만남이 허망한 결과만 낳았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북미관계 개선 없는 국가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유력했던 카드의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윤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담대한 구상'에 걸맞지 않은 작은 실천의 부재에 있다. 담대한 구상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전면전과 유사시 무력통일까지 상정한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의 유예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실 연합훈련 유예는 북미관계 정상화나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대북 제재 해제에 비하면 작은 실천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연합훈련을 담대한 구상의 예외로 두면서 판을 키우고 있다.
김여정의 담화에 담긴 윤 정부에 대한 조롱도 거북하지만, 담대한 구상에 담긴 '유망한 요소'마저 포착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이다. 유망한 요소는 정부가 비핵화 단계를 '동결-신고-사찰-폐기'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점에 있다.
이는 '선(先) 비핵화'를 전제로 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나 '빅딜론'으로 포장된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요구보다 분명 현실적이면서도 진일보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계적 비핵화는 북한이 오랫동안 주장했었던 "단계적 조처"와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트럼프의 빅딜론의 비판하면서 단계적 접근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윤 정부에 대한 체질적인 거부감과 핵이 '국체'라는 환상에 갇혀 유망한 요소를 간과하고 말았다.
어느덧 북한이 1993년 3월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본격화된 북핵 문제가 30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윤 정부는 비핵화를 도모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다. 정부가 조금이라도 상황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의 발단과 문재인 정부 때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된 원인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다방면으로 검토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한미 대통령의 약속 불이행에 있다. 가정형 반문을 던져보자. 30년 전 '팀 스피릿'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던 노태우와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졌다면?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은 위원장에게 연합훈련 중단을 약속했던 도널드 트럼프의 약속이 이행되었다면?
윤 정부는 한미연합훈련을 담대한 구상의 예외지대에 두고 있다. 이러한 접근으로는 담대한 구상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해졌다. 거꾸로 내년 3월로 예정된 대규모 연합훈련 유예를 선언하면서 북한에 대화를 제의해보는 것으로 담대한 구상의 시동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통해 앞서 소개한 '유망한 요소'를 두고 협상을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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