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장관이 새 정부 첫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돌연 대선공약에도, 국정과제에도 없던 취학연령 하향을 발표했다. 내용은 물론 추진 방식에 대해서도 비난이 거세지자, 급히 사후공론화를 시작했다. 나흘 후 개최한 학부모단체와의 긴급 간담회 일정은 회의 당일, 회의 시작 4시간 전에야 단체들에 통보됐다고 한다.
반대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사후공론화라고 해봤자 결국 정책 폐기 절차를 밟으리라는 예측도 있다. 학제 개편 자체는 논의해 볼 만한 주제인데 여론 수렴 없는 졸속행정으로 정책 추진동력을 상실했다는 비판도 있다. 돌봄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비판, 아동의 건강과 행복 관점이 빠졌다는 비판 모두 타당하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취임 석 달도 안 돼 20%대로 떨어진 상황은 이미 이 정책을 예정대로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구체적인 정책의 내용이나 추진 방식을 넘어, 우리는 반복되는 '졸속추진-논란-사후공론화' 순환 너머에서 작동하는 통치에 분노한다. 천천히 추진했더라면, 사전공론화를 했더라면 그 경과가 크게 달랐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다음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비슷한 시기 대통령실은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 최저임금 차등적용 등을 포함한 '국민제안 TOP 10'을 발표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국민제안'을 접수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민관 합동심사위원'이 기준을 알 수 없는 'TOP 10'을 선정한 것도 모자라, 이미 오랜 사회적 논의와 실험을 거쳐 제도화한 사안을 열흘간의 '좋아요' 투표 결과에 따라 '우수제안'으로 선정해 국정 운영에 반영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정작 투표 종료 후 중복·편법 투표 사실이 드러나자 애초 계획한 'TOP 3'시상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튿날 국무조정실은 "기존의 정부 주도 규제개선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이 주도해 규제개선을 추진하는 방식"이라는 '규제심판' 제도의 첫 대상으로 대형마트 영업제한 규제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틀 후 '민간전문가' 5인으로 구성한 '규제심판부'가 제1차 규제심판회의를 개최했다. 비공개 방침이었다가 결국 사후 공개한 민간전문가는 변호사 1인과 경영·경제학과 교수 4인이었다.
회의에는 규제 완화(폐지) 측 이해당사자로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체인스토어협회가, 규제 유지 측 이해당사자로 소상공인연합회, 전국상인연합회,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이 참석했고, 소관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공정거래위원회도 자리했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을 규정한 '유통산업발전법' 조차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 근로자의 건강권 및 대규모점포등과 중소유통업의 상생발전"을 그 목적으로 명시했건만, 대형마트 노동자는 자신의 건강과 안전이 걸린 이 자리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우연히 동시에, 갑자기 불거진 사례들이 아니다. 반도체산업 인력양성을 위해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예산을 삭감했을 때, "교육부의 첫 번째 의무는 산업 인재 공급"이라며 수도권대학 정원 규제 완화를 주문했을 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기업인들의 경영 의지를 위축'시킨다고, 노동자들이 '주 120시간 바짝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운운했을 때, 이미 통치의 원칙과 목표는 정해졌다.
민주주의 축소 및 불평등 심화! 시민사회 및 노동진영에 대한 배제와 억압! 사회권력의 유토피아적 에너지 해체!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연합의 강화를 통한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을 위한 나라 만들기! 우리는 이 정부가 지향하는 통치의 본질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색 갖추기 절차와 참여가 어떻게든 작동하면, 이번 논란만 가라앉으면, 지지율이 반등하면, 통치는 다시 안전하다. 그러니 졸속추진 비판이나 공론화 요구에서 멈출 수 없다. 대통령과 정권 호명도 넘어서자. 더는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기반한 방어와 반격을 시작하자! 노동자 안전과 삶을, 아동·청소년의 행복을, 수도권-비수도권 지역 간 불평등 해결을 더 가열차게 이야기하자! 현실정치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이겨내고, 각자도생에 맞서는 연대적 상상력과 실천을 만들어가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