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민주주의'가 국민투표를 불러냈다

[최창렬 칼럼] 국회도 민의의 통제가 필요해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rule by many)'를 기본 원리로, 이를 선거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제도화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다수 지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어떤 이론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와 함께 인민주권과 평등한 정치참여 등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요소이며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은 유권자들에 대해 대표성과 책임성 등을 담보해야 한다. 권위주의 정치에서 소극적 민주주의로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 차원의 능동적 민주주의로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의미의 인민주권과 평등한 정치참여라는 민주주의 원리가 관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이론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전문성이 강조되면서 점점 공허하고 추상적인 구호로 전락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다수 지배'의 대척에는 '다수의 전제(the tranny of majority)'라는 민주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직접 민주주의의 본거지인 고대 그리스에서도 중우정치는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미국 헌법의 입안자들도 다수의 결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상하 양원제, 불합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선거인단의 승자독식 제도 등을 고안했다.

대중민주주의가 다수의 전제를 가져와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로 퇴행할 것이라는 토크빌의 우려에 대해 로버트 달은 다수 인민의 힘이 지배적이 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위해 일반 대중들의 정치적 평등과 참여의 실현, 이의 기반으로서 실질적 사회경제적 다원주의의 창출을 강조했다.(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최장집 한국어판 해설)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변화가 정치발전이라고 하지만 의회에서의 여야 정당들 간의 합의가 과연 합의제 민주주의에서의 '합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다수결이 다수의 횡포이고 이를 시정하는 의미에서 합의를 통한 의회에서의 의사결정이 '합의제 민주주의'라고 단언할 수 없다면 결국 문제는 의회가 대중의 평등한 정치참여에 의해 선거라는 과정에 의해 구성됐다고 할지라도 인민주권이 실현되는 것인가이다.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이해와 직결된 문제에 대해 얼마나 주권자의 의사가 반영되느냐의 문제가 현대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동의 문제의식이다.

정치엘리트와 의회의 정당지도자들이 이념과 정당을 넘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선거를 의식한 정략적 판단들에 의해 특정 이슈에 대한 결정을 할 때 종국적으로 주권자의 이익에 봉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유권자들도 각자의 이해가 다르고 진영과 이념 성향에 따라 의사가 갈리지만 보편적 의사라는 집단지성의 공감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나 의제들이 전문화되고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직접적인 이해에 노출되지 않을 때 상호 견제하는 정당들의 담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논의를 확장한다면 의회가 인민을 대표한다고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의회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는 심각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도 갈 길이 멀지만 설령 특정 의제에 대해서 의회에서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 인민의 이해와 부합하지 않을 때 이를 시정하는 방안이 사회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민에 의한 통제는 의회에 대해서도 예외일 수 없다. 숙의민주주의나 토론민주주의 등의 포괄적 제도와 국민소환제 등이 단골 메뉴로 거론되지만 이 역시 정교한 제도적 디자인을 통해 완결성을 갖는다는 것은 여전히 지난한 작업이다.

검수완박 관련 법안 개정안들을 여야가 합의했으나 야당의 번복으로 다수 의석을 앞세운 여당의 의도대로 될 전망이다. 중재안에 여야가 합의했을 때도 검찰 직접수사 범위에서 선거사범과 공직자 비리 수사를 배제한 것은 대중 일반이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선거범죄는 올해 말까지 검찰의 직접수사가 가능하도록 보완했지만, 가덕도 신공항도 지난 대선과 향후 지방선거를 의식한 여야 합작의 산물이라면 이 역시 대중 일반의 의사는 무시된 채 정치적 이기주의에 의한 산물에 불과하다.

당장 대안은 보이지 않지만 주권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부분들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외피와 주권자의 이익을 명분삼아 정치엘리트들의 담합과 야합에 의해 국가적 의제와 대형 국책사업 등이 시민들의 이해와 무관한 정치인들의 이기주의에 의해 '나쁜 민주주의'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의미에서의 국민투표 제도는 아직 정책과 관련해서 실시한 적이 없다. 헌법 72조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최근의 검수완박이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이냐에 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헌법재판소는 국민투표법의 헌법불합치 판결과 함께 국회는 국민투표법을 개정하라고 판시했다.

국민투표가 국회를 우회하는 대중 포퓰리즘이라는 부정적 면과 대의제 민주주의 보완이라는 긍정적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제도지만, 시민사회의 뜻이 모아지고 국민투표법이 개정된다는 전제하에 전향적 실시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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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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