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책>(강현석, 김영옥 외 13명 지음, 돛과닻 펴냄)은 기후위기, 젠더, 인공지능, 지역, 착취와 돌봄 등 우리 시대의 '이슈'가 되는 분야의 예술가, 학자, 활동가들의 사유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 선정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지구상의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과잉 생산과 소비, 우리 내면의 혐오와 차별, 그 앞에서 예술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 등 그 문제들을 종으로 횡으로 연결하며 견고한 프레임을 들여다보고, 창작가·시민·활동가 등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 공공의 장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특이한 디자인의 이 책은 모두 재생 펄프 함유율이 100퍼센트인 종이에 콩기름으로 인쇄를 했고, 4X6전지의 24절 사이즈로 버려진 종이를 활용해서 만들었다. 제작 과정과 만듦새에도 고민이 엿보인다.
'MZ세대'라는 말이 마케팅, 정치, 사회과학 등을 휩쓸며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겉핥기 식으로 분석돼 소개되고 있다. '비건', '제로웨이스트' 등이 MZ세대의 행태로 대표된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의 보고서 <2021 MZ세대 친환경 실천 및 소비 트렌드>에 따르면, MZ세대 100명 중 88명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고 100명 중 53명은 환경 캠페인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왜 그들이 환경에 진심인지, 그게 왜 소비로 이어지는 지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필요할 때다.
이 책을 엮은이들은 (당사자들이 MZ세대인 것과는 별개로) MZ세대가 관심이 있는 이슈에 잔뼈가 굵은 활동가들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고민해온 지점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사유는 MZ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특히 이들은 자신의 분야의 '공공성'과 해당 분야의 가치 그 자체에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발레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나길 시도한 60대 이상의 노년의 몸과 함께하는 발레 프로젝트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워크숍, 비혼을 결의한 청년 페미니스트들의 불안과 관련한, '취약한 몸, 취약한 상태'에 대한 질문이자 프로젝트인 "'무사히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오프그리드', '전환마을 운동'처럼, 자연 에너지를 우선시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집과 숲'의 내용 등은 MZ세대가 주목하는 주요 화제에 대한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메타버그 세계관'은 MZ세대의 소비 양상의 주요 경향인 가치와 소비가 일치하는 양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타버그'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메타버스의 오타가 아닌 '메타버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버그가 존재한다 -> 디버깅(버그를 바로잡고 통제하려고 한다)한다->그래도 버그는 존재한다(디버깅하면 할수록)
그 예로 2016년 페이스북은 '아퀼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퀼라'는 무인항공기로 저개발국가에 드론과 지상을 연결하여 인터넷이 개발되지 않은 나라에 무료로 인터넷을 공급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이와 유사한 취지로 시작한 구글의 룬 프로젝트는 구글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인터넷 이용이 어려운 지역에 무료 인터넷을 제공하며 벌룬을 띄운 프로젝트를 말한다.
"이 프로젝트는 인터넷이라는 중요한 매체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유통기한'이 있는 선한 의도와 동시에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류의 절반이 있는 시장을 개척하고 사업의 규모를 키우려는 영리적 의도가 공존한다. 무엇인가의 문턱이나 바닥을 낮추는 데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의도가 공존할 수 있다... 선한 의도가 있는 동시에 더 고도화된 높은 수준의 기술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 양방향으로 일어난다"
결국 버그를 해결하면 또 다른 버그가 추가될 수 있음을 추정하는 것처럼, 동시대의 상황도 여러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기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창출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서비스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저자는 "안과 밖에 있는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하고 그건 광고와 과금 시스템이 잘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어디에선가 그 소비가 활발하게 일어나야만 이 창작 도구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짚는다. MZ세대의 소비가 가치와 연결된다는 점에 비추어 서비스와 가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투자로 설명될 수 있다.
'필패하는 말과 토대없는 믿음'을 통해서는 MZ 세대의 '기득권에 대항하는', 당당한 태도의 고민이 엿보인다. '필패하는 말'은 "패배하지 않는 길, 크든 작든 승리하고 조금씩 안으로 파고드는 말 대신 필패하는 말을 생각한다. 끝내 패배하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패배하기를 의지한다는 저 논리 속에서의 설득이나 승리를 시도하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의 필패하는 말"이다.
"임신중지가 얼마나 불가피한지를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는 대신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고 외치는 여성들이 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강렬한 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필패하는 말을 던지는 것이 예술의 할 일이라고 한다면 이 모두를 포함해 말해도 좋을 것이다. 기존의 말과 비교되기를 , 그것에 입각해 이해되고 판단되기를 거부하면서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은 스스로 말이 된다"
필패할 줄 알면서도, 던지는 말은 장애인들의 지하철 출근 시위와 맥을 같이 한다. 저자는 "장애인의, 여성의, 성소수자의 삶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그것을 그 자체 고유한 존재로서 무대에, 광장에, 거리에 올린다"고 표현한다. 그게 의미를 갖는 이유는 "예술이 패배 이후의 재시도가 허락되는 곳이어서가 아니다. 점진적인 설득과 변화를 통한 승리를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한 실천, 실현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패배를 전복의 기회로 독해한다.
그리고는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를 통해 '기후위기' 국면에서 이러한 감각들이 실현되는 상상력에 대해 고민한다. 저자는 지구를 떠날 때를 상상하며 '대안 사회'를 고민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지구'는 없음을 깨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되는 것이다.
"에너지의 생태적 전환은 에너지원의 탈탇소화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정의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이 반드시 결합되어야만 한다"
예술, 기술에서의 공공성 실현 문제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결국 이 세계의 대안을 상상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MZ세대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된 기후위기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결국 <제로의 책>의 '제로'는 재료가 상품화되는 과정 속에 사라지는 존재들을 찾는 '과정의 제로'로 귀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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