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선거운동 둘쨋날인 16일 이재명 대선후보가 강남역 11번 출구를 찾았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 사건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강남역 살인사건'의 추모공간이었던 '강남역 10번 출구' 바로 옆이다.
이 후보는 이날 유세 현장에서 소위 '이대남'을 겨냥한 청년 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특별한 희생엔 특별한 보상이 필요하다"며 군 복무기간에 입은 손실을 국가가 보전해줘야한다고 공약했다. '공매도 차별금지' 등 주식시장 관련 입장도 밝혔다.
그러나 지난 2020년 11월 25일 "2016년 5월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울분이 가득 찬 메모 행렬로 온통 노랗게 뒤덮혔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말했던 이 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여성을 호명하지는 않았다.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군 복무 청년 피해보상... 이재명이 꿈꾸는 청년 기회 국가"
청년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역에서 유세에서 청년들과 함께 연단에 오른 이 후보는 "청년들도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가겠다"고 운을 뗐다.
이어 "공정한 채용 기회를 만들어내고 남자라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갔다오면 군 복무기간 입은 손실을 우리 국가 모두가 보전해주는 것이 상식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복무기간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하고, 퇴역 후에는 그 기간동안 입었던 손실을 보상할 수 있는, 헌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 피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반드시 보전할 것"이라며 "이게 바로 이재명이 꿈꾸는 청년 기회 국가"라고 강조했다. 또 이 후보는 '개미 투자자'들을 의식한듯 주식시장 개선 의사도 밝혔다.
그는 "투자 기회를 늘리겠다. 지금은 돈이 돈을 버는 시대라 돈 없는 사람은 돈 벌 기회가 없다"며 "자산시장에 청년 참여 기회를 늘리겠다. 주식 시장이 불공정하게 흘러가지 않게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성, 여성 청년 지지자들과 함께 '주가 5천 시대, 주가조작 근절 서약서'에 사인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피켓에는 '공매도 차별금지 등 자본시장 불공정 해소'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날 발표한 청년 공약은 의무 군 복무를 하는 남성 청년과 주식 투자를 하는 청년에 한정된 공약으로 소위 '이대남'에게 최적화된 공약이었다.
잠시 길을 멈춰 이 후보의 연설을 듣던 여성 청년들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자리를 떴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도 대부분의 여성 청년들은 "어차피…"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0대 여성 청년들 "대선 후보들, 여성 배제 경쟁 펼쳐... 여성이 당당하게 살기 어려워"
강남역 주변을 오가는 여성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대선 후보들이 누가 더 여성을 배제하는지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후보들로 인해 '젠더갈등'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며 이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이대남' 구애가 이번 대선의 '여성 소외'를 견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윤 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과 이 후보가 남초 커뮤니티에 올린 글 등을 언급하며 여야가 여성을 배제하는 정치 경쟁을 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후보의 강남역 유세를 지켜본 한 20대 여성은 "윤 후보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고 하니 정책의 초점이 그렇게 맞춰서 흘러가는 것 같다"며 "그걸 의식하고 이 후보도 이날 첫 번째로 기회의 평등을 얘기했는데, 그게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 국한된 것이지 않았냐"고 꼬집었다.
이어 "여성들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강남역 10번 출구지만 그것을 후보가 다 언급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 청년 정책에 대해서는 언급해줄 수 있지 않나. 후보가 공정과 공평을 얘기하는데 남성 청년에 대한 공약을 얘기했으면 여성 청년에 대한 공약도 똑같이 얘기하는 게 공정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강남역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남성 청년에 국한된 정책을 이야기하는데, 그걸 들으면서 소외를 느꼈다"며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대선의 정책 흐름처럼 번져간다. 시대가 퇴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20대 여성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게 2016년인데, 6년이 지난 아직도 정치권에서 여성에 대한 안전과 평등을 보장하는 공약을 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대선 후보들이 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잊은 것 아니냐며"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여성은 여당인 민주당이 여성 정책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당이 사실 그 이전에 미투 사건 등 잘못을 많이 하지 않았냐"며 "여당이 그 사건을 반성해서 더 적극적으로 여성 정책을 내놨으면 좋겠는데, 이 후보가 숨지말고 맞서는 정책을 펼치면 다른 후보에게도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이대남'을 위한 공약을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발표한 것에 대해서 "하필 왜 강남역 11번 출구였을까"라며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백래시'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20대 여성도 "강남역 10번 출구는 그래도 여성들에게 뜻깊은 장소고, 페미니즘 물결이 여기서 시작된 곳인데 '일부러 여기서 그런 정책 발표를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 여성은 이 후보가 남초 커뮤니티에 글을 쓴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의견을 냈다. 그는 "후보가 펨코라는 남초 사이트에 글을 썼던데, 그곳이 여성혐오 커뮤니티인 것은 조금만 검색을 해봐도 알 수 있다"며 "그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은어'를 쓰면서 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글을 올리는 것도 여성을 배려 하지 않은 행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 여성은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대안을 이야기 한다고 해도 그게 먹힐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여성이 너무 소외됐다"며 "여성들이 당당하게 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누가 더 여성을 배제하는지 경쟁 펼치는 여야 대선후보
여성들의 지적처럼 여야 후보들은 대선 초반 경쟁하듯이 여성을 배제하는 행보를 보였다. 역대 대선에서 '평등'이 중요 주제가 되었던과는 대조되는 퇴행이다.
윤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글자 공약을 했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이에 호응하며 부추겼다. 위안부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할머니는 "여성부 페지하지 마시라, 그거 없었으면 우리 죽었다"고 호소했으나 이 대표는 "저희 대선 후보 공약이 그렇게 나와서 그렇게 정했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윤 후보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부 폐지 공약을 내세운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다. 남성이 약자일 수도, 여성이 약자일 수도 있다. 여성은 불평등한 취급을 받고 남성은 우월적 대우를 받는다는 건 옛날 얘기"라고 해 논란을 낳았다.
이 후보도 대선 초반에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홍카단이 이재명 후보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공유해 청년 세대의 젠더갈등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글쓴이는 "이 후보가 페미니즘을 멈춘다고 약속해 달라. 그러면 지지하겠다"고 적었다.
이 후보는 이후에도 남초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올리며 접촉면을 넓혔다. 그러면서 유튜브 채널 '닷페이스'와 '씨리얼' 출연을 연기, 번복하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후보가 사회적 소수자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온 채널에 출연하는 결정을 하자, 남초 커뮤니티에서 반대가 들끓은 탓이다.
이준석 대표는 윤 후보의 '여성 가족부폐지'와 이 후보의 '닷페이스 출연 결정' 관련 기사를 비교하며 여성 배제를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후보가 복어 요리에 도전 중인듯 한데 무운을 빕니다"고 했다. '복어 요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를 독 품은 복어를 손질하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윤석열 후보에게 돌아선 것으로 드러나자 민주당의 '이대남 구애'는 방향을 바꿨다. 닷페이스 출연 논란에도 이 후보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모두가 국민이기 때문"이라며 선을 그었고, 민주당 소속의원 20여명은 지난 14일 당 소속 광역자치단체장의 성범죄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후보의 '눈치 보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 후보는 'n번방' 사건을 최초로 공론화하고 민주당에 영입된 '추적단 불꽃'의 박지현 디지털성범죄근절 특별위원장과의 지난 9일 대담에서도 "대개 성폭력 범죄, 성착취물, 디지털 성범죄라고 하면 (피해자가) 여성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통계적으로 보면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들 중 30%가 남성"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었던 지난 2020년 11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누군가는 '요즘이 어떤 시댄데, 세상 달라졌다' 말할지도 모르겠다"며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뉴스를 뒤덮는다"고 여성의 폭력에 공감했던 것과는 다른 면모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여성 배제에 있어서 두 후보가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비슷하게 가려고 한 것 같다. 민주당은 갈지자이고 국민의힘은 직진이다. 이 후보가 윤 후보, 정확히는 이준석 대표를 따라하려고 했다. 언론에서도 20대 남성이 스윙보터인 것처럼 초점을 맞춘 측면도 있다"면서 "그러다가 윤 후보가 '반페미' 노선을 확실히 하니 여론조사에서도 20대 남성은 윤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 후보는 계속 그 노선을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권 대표는 "이 후보가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 정책을 한다고 해도 20대 여성에게 와닿지 않는 상황이 됐다. 진정성을 의심 받는 상황을 이 후보가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얼마전 이탄희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소속 의원들이 지자체장 성폭력과 2차 가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나. 이 후보 캠프내에도 2차 가해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후보가 이 상황을 모른다면 모르는 것도 문제고, 안다면 이들을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과 청년 등 다양한 인선을 전면에 배치하게 되면 이 후보의 진정성을 알아 주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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