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비호감 대선, 도 넘은 충성경쟁

[최창렬 칼럼] 대선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라는 부제가 붙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저자들은 극우파와 미국의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공화당 인사를 예로 들고 있다.

2016년 오스트리아 보수 진영이 극우파 급진주의자 노르베르트 호퍼의 당선을 막기 위해 녹색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 사례도 들고 있다. 또한 2017년 프랑스 보수 진영 후보 피용(Fillon)은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중도좌파 후보인 마크롱(Macron)을 지지하도록 당원들을 설득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일부 공화당 인사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민주당의 힐러리 후보를 지지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보수 진영 정치인들처럼 당의 이해관계 보다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한국정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 대한 선대위는 물론 양대 정당 소속 정치인들의 맹목적인 후보 비호와 두둔은 편가르기와 패거리 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태는 정당이 문지기(gatekeeper)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정당의 여러 기능 중 공직자 추천, 즉 공천은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대통령 후보 선출 역시 마찬가지다.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때는 최소한 두 가지 사안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첫째, 민주주의의 관리자로서 유권자의 뜻을 가장 잘 대변하는 후보자를 선출해야 한다. 둘째, 필터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거나 위협이 되는 인물을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능은 상충할 수 있다. 이른바 당심과 민심 사이의 조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상충을 완벽하게 벗어날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균형을 잡는 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새삼 대선 후보 선출을 언급하는 이유는 대선이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일치된 비판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두 후보의 가족 리스크가 불거져 나온 상태에서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진영 후보에 대해 호위무사의 행태를 띠고 있는 양상은 대선 자체를 혐오스럽게 몰고 간다. 충성경쟁이 상식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이미 정치는 구태와 퇴행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권인숙 의원은 이재명 후보 아들의 의혹을 두고, "안타깝지만 평범하다"고 했고, 국민의힘의 김재원 최고위원은 윤석열 후보 부인의 허위이력 기재 의혹에 대해 "제목을 근사하게 쓴 것뿐"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평균적 상식을 지니지 못한 문제적 인물일 것이고, 후보에게 돋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치이해를 위해 그러한 망발을 알면서도 했다면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관계자들이 정치를 나락으로 빠뜨리고, 민주주의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비단 이들만이 아니다. 한국정치에서 이러한 문제는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지만 양대 거대정당의 선대위에 속한 인물들의 후보 비호는 도를 넘고 있다.

도식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양대 진영정치가 적대와 증오를 강화한다는 진부한 진단을 할 수 있지만 미시적 차원에서는 정치인의 저급한 수준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80일 남은 대선에서 갑자기 정치인들의 태도가 변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지만 언론에서라도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해 나가야 한다. 평론을 한다는 인사들이 정당에 소속된 인물들과 똑 같은 강도로 특정 후보를 의식해서 발언하는 구태도 진영정치와 위선의 정치를 부추기는 요소다.

민주주의 체제의 최소한의 내용으로서는 기본적 자유의 보장, 경쟁적 정당의 존재, 보통선거에 입각한 정기적 선거 등이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보로 민주주의가 공고화됐다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함정이 있다. 바로 경쟁적 정당이 아닌 적대적 정당들의 존재이고, 이러한 문화를 강화하는 요인들이다. 궁극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비록 한국정당체제가 미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정당과 다른 배경과 구조적 요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정치인 각자의 자각이라도 있다면 상황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유권자와 언론의 감시와 견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선거의 목적과 수단이 도치된 선거문화에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