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81%가 예방접종을 완료했다. 18세 이상으로만 따지면 92%다.
코로나19 백신접종의 철학은 사회적 연대다. 나를 보호하는 것과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서로 이어져 있다. '90'이 넘는 숫자는 서로를 지키기 위한 연대감의 표현이라 할만하다.
감염을 예방하거나 감염되더라도 중증화를 막을 수 있는 백신의 효과는 분명하다. 부작용이 없다 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 안전성의 문제도 크지 않다. 질병관리청의 분석 보도에 따르면, 완전 접종자에서 중증화 발생 예방효과는 92% 수준을 넘는다. 돌파감염의 비율이 늘어난다고 백신의 효과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객관적 증거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곳도 같이 봐야 한다.
첫째, 시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한 나머지 8%를 바라보는 것. 정부는 이들에게 사회활동을 중단하거나 이틀에 한 번씩 PCR 검사를 받도록 요구한다. 이른바 방역패스다. 이를 두고 미접종자를 보호하려는 조치라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감염과 중증화에 취약한 미접종자가 확진자와 덜 접촉하게 한다는 목적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백신접종을 아직 완료하지 않은 이들의 형편을 따지지 않은 채 의무만 강조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전자가 의학적이라면, 후자는 사회적인 것이다.
비장애인에게 백신접종으로 생긴 하루 이틀의 발열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호흡기근육 장애인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새벽길 나서 저녁을 훌쩍 넘겨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에게는 접종을 위한 낮의 '무노동'과 혹시 찾아올지 모르는 몸살이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단속추방 않겠다는 공허한 홍보문을 읽지도 못하는 미등록 이주민은 백신예약 어플의 생김새도 모르고 보건소 위치도 모른다. 비난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보다 먼저 시민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 연대는 당연히 이들의 형편을 더 낫게 하는 쪽을 향해야 한다.
두 번째 시선은 청소년이다. 청소년접종과 방역패스에 대한 문제 제기는 부모의 목소리로 출발해서, 학원을 가지 못할 걱정으로 끝난다. 청소년의 의견을 들을 방법은 일부 기사에 끼워 넣은 인터뷰 한두 줄이 전부다. 출장 접종 등 기술적 방법이 부족했던 것이 논란의 핵심인지 왜 당사자, 청소년의 의견을 묻고 의논하지 않는가. 10년 전 체육관에 줄지어서 신종플루 예방접종을 기다리던 그때의 고민을 지금의 20대와 함께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떤가. 내가 느낀 막연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어떤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누군가의 두려움을 집단이 놀림거리로 희화화해버린 경험은 어땠는지, 이야기가 필요하다. 청소년의 백신 접종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호하려는 연대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청소년들과 토론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싶다. 청소년들은 백신 접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서운 것은 무엇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묻고 답하는 노력이 바로 연대의 출발이다.
마지막은 백신접종 피해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백신접종과 이상반응의 관련성을 다루는 과학적 잣대는 허술하지 않다. 하루에도 수천 건 쏟아지는 백신 관련 논문을 검토하고, 혹시라도 놓친 근거가 없을지 따져보며, 전문가들이 인과성을 평가한다. 지금 근거가 부족하여 '인과성 없음'으로 결정되어도, 미래에 축적한 근거가 이를 되돌릴 수도 있다. 즉, 현재의 과학이 최선을 다한다는 점, 미래의 과학이 일부를 교정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남는 문제가 있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지원을 의학적 논의로 한정해도 충분한가 하는 질문이다. 물론, 정부는 '인과성이 인정되기 어려운 경우'라 하더라도 '백신과 이상 반응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 의료비를 지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빠진 것이 있으니, 여전히 사회적 논의와 소통, 숙의의 과정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백신이 생리주기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시민들의 자발적 보고가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과학적 근거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가 독점하는 의사결정 구조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진 환자는 늘어나고 이에 비례하여 중증 환자도 늘어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시민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번지수가 틀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시민의 연대다. 정부는 '소통'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채 시민을 '훈육'하려 하지 말고, 시민을 논의와 실천의 주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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