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길 잘했구나"...직장 내 괴롭힘과 싸우다 만난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

[2021 직장갑질 뿌수기 공모전 수상작] 벼랑 끝 순간에 동아줄이 되어 주었던 직장갑질119

"직장갑질과 싸웠던 이야기, 직장갑질119를 통해 도움받은 이야기, 직장갑질을 겪고 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격려나 응원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직장갑질 피해를 당한 사람을 돕는 민간 공익단체 '직장갑질119'가 공공상생연대기금과 함께 주최한 '제3회 직장갑질 뿌수기 공모전' 수상작을 지난 7일 발표했다. 총 46편의 수기 응모작 중 8편이 수상했다. 수상작으로는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우수기업으로 알려진 회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이를 신고하고 싸운 해탈 씨의 글(대상), 츄러스 매장에서 일하며 매니저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알바생 1호의 글(우수상) 등이 선정됐다.

그 중 이엘(필명)의 <벼랑 끝 순간에 동아줄이 되어 주었던 직장갑질119>(최우수상)를 싣는다. 글에는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뒤 두 달을 고민하다 회사에 신고한 뒤 오히려 괴롭힘을 당한 한 직장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글쓴이는 괴롭힘도 싸움도 계속되고 있지만, 함께 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아있길 잘했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썼다.

저는 올해 초, 평생을 살면서 겪어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직장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해당 사건은 상사가 제안한 술자리를 가진 뒤, 술에 취한 저를 인근 숙소로 데려다 주겠다는 명목 하에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저는 다시 없을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새벽에 저의 도움 요청 전화를 다른 상사가 받아주어 더 심각한 상황까지는 번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회사에 성추행 피해 신고했지만 돌아온 건 직장 내 괴롭힘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상사는 다음날부터 아무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저를 평소처럼 대하기 시작했고, 사건의 주요한 증인이자 그 사건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또 다른 상사 역시 그 일을 묵과하며 모른 체 하였습니다. 혹시나 민감한 사건이므로 당사자인 저에게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운 건가 싶어 그 목격자인 상사에게 몇 번 면담 제안을 하였지만 전부 거절당하였고, 그 뒤로는 노골적으로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가해자인 상사는 저를 감시하고 사소한 일에도 닦달하는 등 눈치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슬프게도 그런 현실 속에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일을 입 밖에 내면 나는 이 회사를 다니기 어려워지겠구나"였습니다. 어렵게 입사한 회사였고, 청년내일채움공제 등 여러 가지가 걸려 있었기에 저의 고민은 깊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가해자가 저에게 직접적인 업무지시를 내리는 직속 상사였던 것, 그리고 유일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다른 상사 역시 암묵적으로 가해자의 편에 서 있다는 것 역시 저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극에 달하게 만들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참고 다녀보자고 마음먹었지만 매일 매일 가해자의 얼굴을 보며 일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나날이었고, 하루하루 병들어가 정신과 치료까지 고민하게 되는 스스로를 보면서 비로소 이 사건이 언제까지고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문제 상황을 아무 일 없이 덮고 지나간다는 건 결코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속으로 곪아 썩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무려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저는 회사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회사에서는 이상한 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신고로 인해 가해자가 대기발령 되고 나서부터, 부장은 저에게 가해자가 했던 업무를 밀어내기 시작하며 퇴근 직전에 업무를 주고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보고를 하라고 하거나, 제 업무가 미숙하다며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면박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지치고 지쳐 간신히 회사에 힘든 상태를 설명하며 유급휴가를 요청하였으나, 회사에서는 불과 이틀의 유급휴가를 부여한 뒤 가해자가 퇴사하였다며 저를 복귀시키고 그 뒤부터 모든 업무에서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저에게 밥 한 번 같이 먹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같은 팀원들은 저를 따돌렸으며, 회사에서 저는 투명인간이 되었습니다.

직장갑질119에서 만난 공감과 지지,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

그 즈음부터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에 들어갔던 건 회사에 정식 성희롱 신고를 하기 전이었습니다. 여러가지로 고민되는 마음에 이런 저런 것들을 혼자 검색하며 끙끙 앓다가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 링크를 알게 되어 들어가게 되었는데, 입장 초반에는 거의 상담을 하지도 않았고 올라오는 사연들을 많이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발 일이 심각해지지 않고 원만하게 풀려서 이 방에서 상담을 받는 일이 없기를 마음 한 구석에서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도 어쩌다 한두 번 제가 겪은 사건에 대한 고민을 털어보았는데, 당시에는 스탭이 아닌 다른 일반 대화 참여자들이 분개하며 "그건 범죄다", "경찰에 신고해야 된다"고 같이 화내주고 공감해 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지지가 있었기에 제가 회사에 신고를 할 용기를 더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희롱 신고 후 본격적인 회사의 괴롭힘이 시작되고 나서야, 저도 직장갑질119에서 본격적으로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성희롱 신고 후 제가 회사에 어떤 조치를 요구 할 수 있는지, 회사의 이러한 꺼림칙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제가 어찌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질문해 가며 조언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평일에는 거의 하루 종일 이어지는 상담시간 동안 저는 아침이건 낮이건 저녁이건 그때 그때 필요한 질문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 때 수시로 직장갑질119에서 상담을 받으며 대응방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메일 상담도 한두 번 받아보긴 하였지만, 저로서는 실시간으로 문답이 가능한 오픈채팅 상담을 더 선호했습니다. 재직 중인 상황에서 매일 매일 새로운 상황이나 변수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상담을 수시로 받다보니 어느 순간 다른 참여자들의 상담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상담이 필요할 때만 방에 들어가 저에 대한 상담을 받곤 했는데, 자주 상담을 받다보니 저처럼 직장갑질로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의 사연도 보이기 시작하고 그 사람들의 사연들에 공식 스탭들이 어떤 식으로 조언을 주는지도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저와 비슷한 사연, 혹은 저에게 일어날 법한 가능성이 있는 사연들도 있었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보며 저 역시도 회사의 대응방식을 예측 해 보고 방어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멈추지 않는 회사의 괴롭힘, CCTV 설치에서 투명인간 취급까지

그 와중에도 회사의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사소한 일로 갑자기 동료직원들이 시비를 걸어오거나, 오히려 제가 억울한 상황을 만들고 저를 가해자로 신고하는 등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는 저의 고충상담은 무시하고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저를 신고하는 다른 직원들의 내용은 그 사안이 아무리 어이없고 하찮은 것이라도 정식 신고접수를 받았습니다. 회사는 저에게만 경위서를 요구하거나 사측 노무사의 상담을 받고 저에게 주의를 주는 등의 행동을 이어갔습니다. 인사팀장이 갑자기 저를 불러 "요즘 왜 회사에 남아있냐"고 물어본 뒤 다음날 사무실 곳곳에 CCTV를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회사에서 다 같이 식사를 주문할 때도 저만 빼고 식사를 시키거나, 갑자기 입사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저에게 수습발표를 시키고, 공개석상에서 힐난을 하는 등의 행동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제대로 된 업무 하나 받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너무 할 일이 없어 자발적으로 쓰레기통을 치우고 세절기를 비우는 등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중이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인사팀장이 저 모르게 저의 전 직장에 연락해서 제 뒷조사를 하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노동청에 신고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신고를 하게 되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참고 견디다 보면 서서히 나아질 수 있는 상황인데 제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며 노동청 신고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픈채팅방 상담을 통해 여러 가지 자문을 받고 나서 관할 노동지청에 성희롱 신고에 대한 불이익조치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진정을 제기하였습니다. 회사에서 노동청 진정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관리자급 직원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긴급 회의를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저에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날 손이 벌벌 떨리고 무서워서 가슴을 졸였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나날이 계속 되었지만 회사는 저에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고, 기존에 하던 직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에게 작은 업무나마 부여해 주기 시작 하였습니다.

노동청 신고를 통해 상황이 조금 나아지는 걸까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던 때,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직원들 대부분이 이사를 나가고 나서야, 그 날이 이삿날이라는 것을 저만 몰랐다는 것을 알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온종일 이삿짐을 나르고 사무실이 분주한 와중에 저만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서 있었고, 그런 저에게 누구 하나 말을 걸지도 하다못해 너도 놀지 말고 짐 나르는 거나 도우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투명인간 취급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업무시간 중에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려 본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 날 상담을 받았고, 상담 스탭은 제게 "그러한 상황 역시 근로감독관에게 말해라. 계속해서 모든 상황을 수시로 전달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힘든 시간 겪었지만 "살아있길 잘했구나" 생각 들게 해준 직장갑질119

그 날의 충격 이후로 저는 한 달 간 제대로 회사를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습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심리 상태도 불안정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근로를 하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회사에서는 병가를 신청하려면 진단서가 증빙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했고, 직장갑질119 상담을 통해 산재신청이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산재신청까지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계속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아직 어느 것 하나 결론이 난 것이 없고 회사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사평가도 엉망이고 동료와 융화력도 부족하다는 등의 주장을 이어나가며, 직장 내 성희롱과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벌써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긴 싸움을 해 나가는 와중에 도움을 받으려 찾아간 노무사나 의사에게서 2차 가해를 당하고 오히려 상처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문 라이센스가 있다는 것이 곧 갑질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 주고 같이 해결책을 찾아 나가며 힘을 주는 조력자라는 것과 동치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러한 긴 과정 동안 항상 갑질을 당하는 근로자의 편에 서서 늘 고민과 조언을 함께 해 주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 주며 전문가의 조언까지 겸비해 주는 직장갑질119 스탭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러한 긴 싸움을 지금처럼 버텨내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스탭이 아니라도 오픈채팅방에서 같은 아픔을 가진 근로자들끼리 서로 위로와 공감을 나누고, 때로는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며 조언을 주고받는 것 역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매일 매일을 버텨나가고 있는 저에게, 직장갑질 119는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이자 조력자, 그리고 선생님이었습니다.

아직 결론이 난 것 하나 없어 이러한 수기를 작성하는 것이 저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 저 역시도 직장갑질119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으며,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제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다음 날, 저의 이메일 사연을 보고 스탭님이 직접 연락을 주셔서 제 사연으로 언론 보도자료까지 실어주셨을 때는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고 차갑던 세상이 따뜻해지고 선명해 지는 느낌이 들면서 "살아있길 잘했구나"라는 생각까지 들 만큼 정말 큰 위안과 지지가 되었습니다.

항상 핍박 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갑질에 당하는 을들을 위해 고민해 주시고 힘 써 주시며 다방면으로 도와주시는 직장갑질119에 이렇게나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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