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시나리오가 아닌 기후정의 시나리오를

[인권으로 읽는 세상] 탄중위 해체 공대위를 시작하며

8월 5일,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을 발표했다. 8월 31일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이 제정됐다. 작년에 연이어 발표된 정부와 국회의 탄소중립, 기후위기 비상 선언이 집행과 제도화의 궤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 초안 발표와 법안 통과 이후, 기후운동 진영의 반응은 비판 일색이다. 탄소중립도 이루지 못한 시나리오의 문제,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의 부재, 과거 정권을 떠올리게 하는 녹색성장의 등장이 주 비판 지점이다. 정당한 비판이지만, 충분하진 않다. 특히 체제전환을 내걸었던 기후운동이라면 말이다.

탄소중립 시나리오, 기업과 자본의 기후위기 대응 전략

기후위기가 이미 현실이 된 상황에서, 온실가스 감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위가 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놓은 게 자본의 기후위기 대응책인 '탄소중립 시나리오'다. 탄소중립위가 발표한 3개의 시나리오 중 2개는 탄소중립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윤순진 탄소중립위 위원장은 석탄발전을 중단하지 않으면 탄소중립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황당한 해명을 했다. 진실은 윤순진 위원장이 시나리오를 발표한 당일에 밝힌, 석탄발전의 조기중단은 '법적 근거와 보상 방안 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것이다. 이는 기존의 화석연료 기반의 설비와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제한이나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실가스 감축을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재생에너지를 비롯한 녹색 기술이 발전해서 시장에서 화석연료보다 저렴해지면 된다. 어디까지나 공정한 자본주의적 경쟁의 결과로 화석연료는 퇴출당할 것이라는 낙관이다. 그게 아니라면 에너지 수요 자체를 줄이는 게 가장 확실한 감축 경로이지만, 산업부문 에너지 수요는 전혀 변화가 없다. 산업자본의 생산 규모를 줄이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화석연료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스스로 시장을 통해 에너지원만 바꾸는 녹색 자본주의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시나리오'다. 아니,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것을 명분 삼아, 국가 재정을 통해 새로운 녹색 시장에 손쉽게 진출하겠다는 자본의 새로운 돈벌이 프로젝트다.

탄소중립 시나리오는 이를 '책임성의 원칙'과 '혁신성의 원칙'으로 승인한다. 기후위기의 책임은 기업과 자본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게 있다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시장의 창의성이 기후위기의 해법이 될 것이라며 '혁신'을 외친다. 결국,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녹색'을 앞세운 정부 지원은 덤이다. 분명 녹색 자본과 시장은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화석연료 자본이 투자로 확보한 자원 채굴권, 탄소경제 아래에서만 작동하는 설비와 원료 형태의 생산자본이 이윤 논리로 계속 작동한다면 온실가스 역시 계속 배출될 것이다. 무엇보다 시장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철칙인 '규모의 경제'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지속되는 한 온실가스 감축은 불가능하다.

온실가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 줄일지가 중요하다

상황이 이런데 탄소중립 시나리오에 대해 감축량이 충분하지 않다든가, 감축시기를 앞당기자는 제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0개 청년기후단체가 탄소중립위에 제안한 '2040 기후중립 시나리오'가 대표적이다. 모든 종류의 온실가스를 포함한 개념으로 기후중립을 내세우고, 탄소포집저장기술과 같은 불확실한 기술을 최소화하고 10년을 앞당긴 시나리오를 제안했다. 이를 위해 2030년 석탄발전 중단, 도심 교통량 50% 감축, 2040년 이후 내연기관차 운행 금지와 같은 과감한 정책제안을 한다. 그림은 좋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탄소 가격을 제시해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산업구조 전환을 하도록 유도하겠다고 한다. 목표는 과감하지만 수단은 오히려 시장과 기업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탄소중립, 기후중립, 배출제로라는 목표들과 온실가스 감축 50%, 60%라는 수치들, 2030년과 40년, 50년이라는 시기까지, 기후운동은 언제나 숫자들과 싸워왔다. 숫자는 중요하지만, 숫자를 현실로 만들 수단과 힘이 더욱 중요하다. 탄소중립위에 참여한 시민사회 출신 민간위원들 역시, 정부와 산업계 주도의 시나리오를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참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 대한 개입이 '숫자'의 변경에 그치는 순간 이미 실패한다. '탄소중립 녹색성장법'과 시나리오 원칙에서 분명하게 밝힌 시장과 자본 중심의 기후위기 대응 기조가 폐기되지 않는 이상, 개입은 '사회적 대화와 참여'의 의미 있는 사례로 이용당할 뿐이다.

'사회적 대화' 이전에 '사회적 권력'을 형성하자

주식과 부동산 광풍에서 확인하고 있듯이, 시장과 자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지구 생태계의 파괴, 인류 문명의 종말을 경고하며 근본적인 체제전환의 목소리를 키웠던 기후운동이 이제는 무엇에 맞선, 어떤 체제전환인지를 분명히 밝히며 대안을 만들어가야 한다. 탄소중립 녹색성장법과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에 대한 의례적인 비판을 넘어서야 한다. 늘상 벌어지는 정부의 부족하고 관료적인 계획이 아니다. 저들은 이제 앞으로 한국사회의 기후위기 대응은 시장과 자본 중심으로 해나가겠다는 전략을 선포한 것이다.

지금은 저들이 마련한 자리에 앉아 '사회적 대화'를 할 때가 아니다. 그렇다고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결정되는 탄소중립위를 무시하고 우리끼리 '대안'만 이야기하고 있을 수도 없다. 탄소중립위를 앞세워 진행되는 정부와 자본의 이 프로세스에 맞선 투쟁이 필요하다. 시장과 자본이 만들어낸 기후위기와 삶의 위기가 결코 다른 위기가 아님을 외치며, 대안은 그들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을 투쟁을 통해 확인하고 조직해나가야 한다. 기후위기에 맞서고, 기후위기 속에서도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감각과 전망은 투쟁 속에서 더욱 구체화될 것이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선 시민과 공동체는 이미 삶의 위기의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다. 이 싸움들을 엮어내며 저들의 탄소중립 시나리오에 맞설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을 조직하는 것, 지금 가장 필요하고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대안이다.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아닌 기후정의 시나리오를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다.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서 2050년 탄소중립을 맞춰놓은 시나리오가 하나 있을 뿐이다. 그냥 엉터리 시나리오는 아니다. 아무리 기후위기라고 할지라도 자본 소유권과 통제권은 불가침의 영역이며, 녹색자본과 시장 육성에 몰두하겠다는 진지한 전략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기후정의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얼마로 정할지, 이걸 실현할 기술과 제도가 무엇인지를 나열하는 게 아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감축과 적응'을 위해서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가 그려지는 시나리오여야 한다. 그렇게 투쟁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권력'이 만들어가는 기후위기 시대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를 함께 상상하고 행동을 시작하는 '기후정의 시나리오'가 쓰여야 한다.

정부는 탄소중립 시나리오와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탄소중립위원회를 통해 10월 말에 결정하겠다고 공표한 상태다. 그건 기후위기 대응이 아니라고, 너희들은 틀렸다고 외치는 이들이 모였다. 노동자, 농민, 반빈곤 당사자, 장애인, 청년, 인권, 동물권 활동가와 최전선의 시민들이 모였다. 그렇게 '탄소중립위원회 해체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공동대책위'가 꾸려졌다. '기후정의 시나리오'의 첫 번째 장면은 이미 촬영을 시작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프레시안>과 <비마이너>에 공동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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