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20년, 북한의 ICBM과 소성리 주민의 고통

[정욱식 칼럼] 미국에게 물어야 한다

9.11 테러가 발생한 다음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논평을 내놨다. "매우 유감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은 테러리즘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다"며, "유엔 회원국으로서 모든 형태의 테러, 그리고 테러에 대한 어떤 지원도 반대하며 이 같은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비극적인 사건에 북한이 이러한 입장을 내놓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북한은 또 당시 미가입 상태에 있었던 반테러 국제협약에 가입하는 등 '성의'도 보였다. 그러자 국내외 일각에선 북한의 이러한 신속한 언행이 북미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평을 내놨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

9.11 테러 직전까지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이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는 최대 구실로 북한 위협을 들고 있었다. 9.11 테러 발생 1시간 전의 일이었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공화당 의원들을 펜타곤 회의실로 불러 모아 불평을 쏟아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능력을 입증했다"고 주장하면서 2002년 MD 예산이 테러 방지 예산보다 적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가 탄도 미사일이 아니라 '커터 칼날'로 무장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된 여객기 공격에 의해 발생하면서 MD에 대한 생각을 바꿨을까? 북한이 반테러 입장을 밝힌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를 MD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무마시키는 호재로 활용했다. 이를 위해 '북한위협론'이라는 군불을 부지런히 지폈다. 북한을 이라크와 더불어 최대 위협 국가로 지목하곤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럼스펠드는 북한이 9.11 테러의 주범인 알카에다에 생화학무기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거론했다. 물론 증거는 없었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면서 MD에 제한을 둔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1972년부터 30년 동안 "국제 평화와 안정의 초석"으로 불렸던 ABM 조약은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심지어 2002년 1월에는 이라크, 이란, 북한을 싸잡아 "악의 축"이라고 부르면서 선제공격도 불사할 뜻을 내비쳤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행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선 후세인 동상을 쓰러뜨리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다. "김정일은 후세인 동상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평양에 있는 아버지 동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힘을 똑똑히 목도한 북한이 이제는 미국의 말을 순순히 들을 것이라는 '이라크 효과'에 대한 과신이자, 그렇지 않으면 북한도 이라크와 마찬가지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역)효과는 있었다. 김정일 정권이 전쟁 억제력을 갖지 않으면 이라크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며 핵개발에 다시 나선 것이다.

9.11 테러 20년이 지나면서 그 여파는 한반도 곳곳에 퍼져갔다. 우선 럼스펠드의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그가 1990년대말-2000년대 초에 북한의 ICBM 개발 성공을 운운했을 때, 이에 동조하는 사람보다는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북한이 ICBM 개발 문턱을 넘어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렇듯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MD에 대한 미국의 광적인 집착과 동전의 앞뒤 관계에 있다.

성주 소성리 마을 주민도 9.11 테러 여파로 고통 받고 있다. ABM 조약이 살아있었다면 사드 배치는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어떤 구실을 들어서라도 이 조약을 파기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국 민주당과 나토를 비롯한 동맹국들의 반발도 거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은 "우리는 이 시점에 MD 논쟁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며 입을 다물었다. 미국의 동맹국들도, ABM 조약의 다른 당사자였던 러시아도 비슷했다.

뒤이어 집권한 민주당 정권들인 오바마 행정부는 사드 배치를 결정했고, 바이든 행정부는 완전배치를 위한 공사를 서두르라고 채근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미군 철수에 이은 아프가니스탄의 대혼란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본다. 그러나 이 역시 한쪽 눈으로만 보는 것이다. 대북정책에는 '외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이에 못지않게, 때로는 더 중요한 게 '군사' 분야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극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중국을 견제·포위·봉쇄하는 데에 더더욱 힘을 집중하려고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위협론'도 계속 꽃놀이패로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의 국방비 증액도 계속 요구해 더 많은 방위비분담금도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비롯해 한미동맹의 성격을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 맞추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정책 방향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심대하다. 한미동맹만 퇴행적으로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북중동맹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맹은 '공동의 적'을 기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최근 북중 사이에는 미국에 대한 공동의 위협 인식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잘못된 길로 가는 데에는 친구들의 진정어린 조언을 무시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의 일부 동맹국들은 아프간을 침공할 것이 아니라 탈레반과의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대다수 동맹국들은 이라크 침공이 "지옥의 문"을 여는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미국은 이 역시 뿌리쳤다.

이제는 우리도 미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 이미 미국에 준 방위비분담금이 남아도는데 더 달라는 게 친구로서의 도리냐고, MD에 비판적이었던 미국 민주당과 그 정권이 소성리 주민들의 울분을 외면하고 사드 공사를 계속 강행해야 하느냐고, 한국을 원하지 않는 분쟁에 끌어드리려는 것이 동맹국이 할 일이냐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국과 이런 식으로 경쟁하고 갈등하는 것이 과연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 물어야 한다. 미국의 소극적인 대북정책이 '북한이 곧 ICBM를 갖게 될 것'이라는 럼스펠드의 자기충족적 예언을 실현시켜줄 결과를 낳고 있는데, 이게 과연 미국의 이익이냐고 물어야 한다.

미국에서 "잊힌 전쟁"으로 불렸던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걸 끝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물어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이익은 군산복합체의 부당한 영향력을 뿌리칠 때 증진될 수 있다는 60년 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절규를 잊었느냐고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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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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