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에 이른바 ‘이준석 현상’이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이대남’의 존재가 이슈화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사실 이 ‘이대남 현상’은 그간 우리 사회 저변에서 상당 기간 잠복하고 있었으며, 이 잠재적 존재에 의해 ‘이준석 현상’은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준석 현상’에 의해 ‘이대남’은 정치적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그들의 눈은 거시(巨視)에 있지 않고 미시(微視)에 있다
‘이대남’, 대체로 그들의 눈은 거시(巨視)에 있지 않고 미시(微視)에 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는 기후위기도 단지 ‘강 건너 남의 일’일 뿐이며, 당장 내 일이 아니라는 경향성을 지닌다. 그런 기후위기 같은 큰 문제보다는 당장 더 개발하고 더 성장해야 내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회구조가 아니라 ‘개인’에 몰두한다. 시험이나 고시제도에 의해 형성된 우리 사회 관료주의의 고착화로 인한 부패와 난맥상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자신들에게 닥친 자신의 문제는 취업이고 눈앞에 다가온 시험일 뿐이다. 유치원부터 학원 과외를 돌고 도느라 무엇인가를 숙고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애당초 사회에 대한 관찰과 성찰은커녕 공부와 시험 외에 다른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에 대해 거의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개인주의 세대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강압에 의해 ‘시험지옥’으로 내몰리며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비인간적 경쟁 속에서 홀로 버텨왔다. 이웃들과 더불어 같이 산다는 그런 의식은 도통 와닿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에게 그랬듯, 사회에 대해서도 ‘저항’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순응’하지는 않는다. ‘불만’이 대단히 크다. 그러면서 오로지 홀로 노력하여 불만족한 현실로부터 탈출을 모색한다. 그 유일한 방법은 시험을 잘 보고 돈을 더 많이 벌어 사회의 더 높은 자리로 상승하는 것이다.
선배 세대들은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청년기에 몸을 던져 사회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들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커다란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보다 상위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 분노하지 않는다. 대부분 주어진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의 지위 상승에만 관심을 갖고, 익숙한 ‘시험’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회에 진입하고자 노력한다. 그때 정부가 한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자 자신들의 정규직 취업 기회를 그만큼 박탈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발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유일한 탈출구로 간주되는 공정성을 해치는 것이며, 그것을 ‘반칙’으로 인식한다.
광주유공자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는 제도로 인하여 취업문이 좁아졌다고 하여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판 대열에 동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징병 대상이 아닌 여성들이 취업에서 유리한 조건을 불공정하게 제공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군복무 가산점을 요구한다. 비트코인 투자로 돈을 벌어보려는데 거기에도 세금을 징수하려는 정책에 분노하게 되고, 부동산 폭등으로 아예 부동산 투자의 접근 기회조차 봉쇄시킨 정부에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면서 반정부 진영에도 가담하게 된다.
‘시장 이론’에는 반드시 ‘공리(公利)’의 정신이 필요하다
한편 ‘이대남’들은 많은 경우 이를테면, 기업의 고용에서 대체로 남성을 여성보다 더 선호한다고 판단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시장 원리’라며 옹호한다. 부동산 정책이 잘못된 것도 근본적으로 시장 원리를 무시하고 위배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면서 ‘시장 지상주의’를 내건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이란 기본적으로 대자본이 지배하고 동시에 기득권이 우위를 지니게 되는 곳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행위의 동기로 파악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도 흔히 시장 만능주의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오히려 일체의 독점과 특권을 반대하고 특권층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없애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창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개념에는 공공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해서 시장 참가자의 이기심뿐만 아니라 공리(公利)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는 독점적 이익과 경제적 집중을 반대했으며, 동시에 공공의 복지, 학교, 사회간접자본 등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른바 ‘경제 자유주의’, 혹은 ‘경제 방임’이란 억압받는 사람을 위한 ‘경제 자유주의’인 것이었지, 결코 잘 사는 사람을 위한 ‘경제 자유주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시험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시험에 의한 ‘서열주의’는 용인한다. 이것은 부모들의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교사와 학원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오로지 이 말만 듣고 자랐다. 이는 그들의 진리가 되었고 세계관으로 자리잡았다. 기성세대의 부모 세대는 먹고 살기 바빠 그리고 자신들의 자식 세대보다 교육 정도가 낮은 까닭 등으로 자식들에게 강요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부분적인 성공’과 ‘부분적인 실패’를 토대로 자식 세대에게 철두철미 ‘성공 지상주의’와 ‘출세 지향주의’만을 강요하고 주입했다. 최근 조희연 교육감이 자신의 두 자녀를 외고에 보낸 점을 ‘사과’했듯, 이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한 치의 예외가 없는 보편적 현상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대규모적인 미국 조기유학 세대로서 대체로 일종의 ‘명예 백인’ 의식의 서구적 시각을 지닌다. 그들의 반중 감정과 반북 의식은 일반적이고,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아시아계 외국인들 및 이민에 대해서 대개 부정적이다.
“시험에 의한 공정”, “세습에 의한 공정”은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일 수 없다
결국 오늘의 ‘이대남’ 현상은 586을 비롯한 기성세대가 낳은 필연적 산물이다. 자기 자식은 반드시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반드시 출세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내로남불’ 사고방식이 낳은 우리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너무 가혹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사건을 역사에서 테르미도르 반동(反動)이라 부른다. 오늘 ‘이대남’ 현상은 일종의 반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동 역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대남’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들이 의식하지 않았던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추동력으로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대남’ 현상이 제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 과연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가?
물론 ‘이대남’ 현상에는 여러 부정적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기성세대가 낳은 산물이다. 결국 사회구조의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천해나가는 것이 사회구성원 모두의 임무다. 특히 우리 사회 곳곳에 온존하고 있는 독점 및 특권 그리고 이의 세습과 이로 인해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모든 정책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 586이 오랫동안 똬리를 틀고 있는 정치독점의 해소 역시 긴급한 과제다. 그리하여 “시험에 의한 공정”이 아닌 그리고 “세습에 의한 공정”이 아닌,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과 공존(共存)이 보장되는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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