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지만, "조정된 실용적인 외교적 접근"과 "단호한 억제"를 두 축으로 삼고 있다. 3일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으로부터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들은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결정된 것을 환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주장한 것처럼 "조정된 실용적인 외교"와 "단호한 억제"는 상당한 긴장 관계에 있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이 전쟁 억제력의 핵심으로 삼아온 핵무기 프로그램의 포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미 압도적인 대북 군사적 우위에 있는 미국이 동맹국들과 대북 억제력을 강화할수록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내릴 가능성도 낮아진다. 이에 따라 새로운 대북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적인 변수는 대북 억제 추구가 외교를 방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하는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 고위관료들이 "실용적인"과 더불어 강조하는 수식어는 "조정된(calibrated)"이다. 이 단어를 유독 강조하는 이유는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이 4월 30일에 "일괄타결에 초점을 두지 않을 것이고 전략적 인내에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밝힌 대목에 잘 담겨 있다. 일괄타결은 비현실적이고 전략적 인내는 역효과가 컸던 만큼, 두 정책을 보정해 실용적인 접근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바이든 행정부는 "단계적(step by step)"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꺼린다. 이 표현이 북한의 핵 동결 정도만 받아내고 핵 폐기는 사실상 포기하거나 무한정 늦추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정된"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 행정부들의 대북정책을 '보정'하는 동시에 단계와 결과 사이의 '연계성'도 강화하겠다는 취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밝힌 입장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대북정책과 관련해 "일정한 형태의 외교에 대한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는 비핵화라는 최종 결과 위에 조건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핵화라는 목적지가 분명해야 단계를 밟을 수 있다는 취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기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료들의 발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5월 1일자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담겼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위 관료가 "우리의 접근은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을 비롯한 이전 합의들을 토대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는 북한의 입장과 교집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은 총비서는 지난 8차 노동당 대회에서 새로운 북미관계는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의 화법에서 주목할 점은 또 있다. 초기에는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고집했다가 대북정책 검토가 완료되었다고 밝히면서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비핵화'는 북한을 포함한 당사자들이 합의한 공식적인 표현이 아닐뿐더러 북한의 일방적인 핵포기를 요구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이 표현을 사용할수록 한반도 비핵화는 멀어지는 속성을 품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바이든 행정부가 늦게나마 '한반도 비핵화'라는 정명(正名)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문제 해결의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삼을 경우 북핵 해결과 더불어 미국의 대북 핵위협 해소를 비롯한 안전 보장 방안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 단계에 걸맞은 대북 제재 해결,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북미 수교, 한반도 군비통제와 군축 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과 대북 관여정책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바이든의 대북정책이 시동을 걸려면 북미간의 접촉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북한은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포스트> 칼럼리스트인 조쉬 로긴은 미국 정부의 복수의 고위 관료들을 인용해 "바이든 팀은 최근 완료한 정책 재검토 결과를 전달하기 하려고 시도했으나 김정은 정권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고 썼다.
동시에 그는 백악관이 대북정책 특별대표 임명을 주저하고 있는 점을 들어 "대북정책이 여전히 바이든 행정부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고 덧붙였다.
결국 바이든의 대북정책은 외교와 억제의 긴장, 단계와 결과의 긴장, 대북정책과 대중정책의 긴장으로 겉돌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대북 제재를 유력한 지렛대로 여기고 있지만, 이 역시 실효가 없다. 북한은 '제재할 테면 하라. 우리식대로 살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의 대미 담화에서 이전엔 단골 메뉴였던 제재에 대한 비난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장 시급한 것은 대화 재개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대화 재개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한국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8월 연합훈련 취소를 가능한 빨리 발표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과도한 비난보다는 실효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대북 제재를 유지·강화하겠다는 말보다는 북한의 긍정적인 조치에 걸맞게 제재를 풀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화법이 도움이 된다. 북한도 대화를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를 대화의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를 둘러싼 동상이몽을 풀어갈 수 있는 창의적이고도 실용적인 해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펴낸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의 조건>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 필자의 신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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