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우리를 바꾸지 못한다면…

[창비 주간 논평] 'K-방역'이란, 코로나 방역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밀도를 높이는 일

지난해 6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으로 전해지는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오히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라는 말은 내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위기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건 얄팍한 위로라는 것, 눈앞의 위기가 뭐든 그전부터 불평등이라는 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였다. 그러니 그 발언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서는 아니고, 위기를 헤쳐나갈 '컨트롤타워'에서 발화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전의 정부에서라면 컨트롤타워 자체가 없었으리라는 사실과 대조되어 강한 인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어찌 보면 당연한 이 발언에서 나는 민주주의의 기운을 새삼 느꼈고 동조하는 심정으로 그 다짐을 팬데믹과 싸우는 우리 사회의 '수행도'를 평가할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팬데믹 상황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수행도'를 둘러싼 평가는 유난히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했다.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방역에 대한 평가 자체가 첨예한 정치 논란의 대상이고,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잣대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숫자만 감안하려 해도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금은 이제까지의 누적 감염자 수치보다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수치가 감소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항목이 될 법하다. 하지만 이런저런 기준에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컨트롤타워가 표방한 저 다짐이 있기 때문이다. 즉, 'K-방역'이란 코로나19를 막는 일과 민주주의의 밀도를 높이는 일을 하나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결의를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과제의 성공으로서 성공하고 그 과제의 실패로서 실패할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는 여하한 평가보다 과제 자체를 망각하지 말라는 촉구가 오히려 절실해 보인다. 그 점을 확인시켜주듯, 코로나19 확산의 고비와 씨름하는 이 와중에도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나날이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싸움이 핵심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저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불공정에 저항하는 민주주의를 말했듯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쥐고 휘두르는 검찰의 무소불위도 살아 있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민주주의라 하고, 터무니없는 판결에 대한 질타에도 법관들은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맞선다. 진실의 탐구를 저버린 언론이 제 수준에 맞는 '중립성'을 민주주의의 핵심인 척 내세우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도대체 안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푸른역사 펴냄)의 '민주주의' 항목을 보면 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서술은 자못 허탈한 지점에 멈춰 있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사용하며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만유개념이 되었고, 이를 통해 잠재적으로 (…) '텅 빈 상투적 표현'이 되었다"라는 것이다.(크리스티안 마이어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민주주의와 독재>(나인호 옮김, 178면) 1972년에 서술된 이 사전의 내용을 다 받아들일 근거도 이유도 없지만 거기에 적시된 위험만큼은 현재성이 있다. 민주주의의 결핍을 절실히 말할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할 때, 즉 제도 전반이 어느 정도 민주주의적이라고 생각되는 시점에 도달할 때 그 위험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텅 빈 표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확립된 법과 절차 속으로 추방되고 감금되는 것이다.

적법성이니 절차적 공정성이니 하는 말이 금과옥조가 되는 현상이 그런 위험의 뚜렷한 징후이다. 법과 절차에 따라 '능력껏' 얻은 것들을 지키는 일이 민주주의의 진전을 향한 어떤 변화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라는 희한한 주장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란 살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번번이 법과 절차를 초과하며 오히려 법과 절차가 그로부터 정당성을 빌려야 한다. 법의 내재적 한계를 논하면서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정의의 정신을 갖지 않은 채, 어떤 식으로 규칙과 구체적 용례를 새롭게 발명하지 않은 채, 그저 정당한 규칙을 적용하는 데 만족한다면 (…) 법의 보호를 받을 수는 있어도 정당한 건 아닐 것"이라 했다.("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eds. Drucilla Cornell, Michel Rosenfeld & David Gray Farson, Routledge 1992, 17면) 민주주의와 공정함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신에 따른 갱신을 거부하는 한 공정한 것조차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팬데믹이 더 큰 위기의 전조임을 감안하면 위기의 극복과 민주주의의 진전을 연계시키는 임무의 함의는 한층 커진다. 어떤 위기와 재난이 오든 그것을 민주주의 후퇴나 지연의 빌미로 삼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K-방역'이라는 사뭇 오글거리는 명명을 감수하며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싸움이 포함되듯이 민주주의적 가치로 이름 붙인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자유가 그렇다. 바이러스 덕에 "더 분별 있는 자유 관념"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지적처럼(Rocco Ronchi, "The Virtues of the virus," The European Journal of Psychoanalysis, 2020.3.14.) 팬데믹 시대는 자유에 대한 서구적 이해 수준이 심각히 제고되어야 함을 드러내주었다. 재난 피해의 복구를 여전히 '지원'이나 '복지' 차원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교정하려면 다분히 잊혀온 민주주의의 가치인 '우애'를 새로이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정서적 호소가 아닌 정치적 권리로서의 우애라는 차원 말이다. 팬데믹이 우리를 바꾸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바꿀 수 있을까. 변화를 위한 기회가 하나의 '은총'임을 무섭게 되새겨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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