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팔지않는 매화,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기고] 가야할 길 더 보듬고 치열하게 매진하렵니다

선생님! 남녘에서 매화 소식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만 1년을 넘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봄 소식은 어김없이 들립니다. 그러나 올 해 봄이 온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순리를 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안고 오는 봄인 듯합니다. 기존의 모든 질서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바이러스 지상주의 세상에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처연합니다.

우리의 사고와 섭식, 행동, 총체적 문명의 대전환을 예비하는 이 '시대의 봄'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거기에 담길 우리의 담론은 어떠해야하는지. 보이지 않는 미물과의 투쟁에서 새로운 봄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던져야 할 질문이 너무 많습니다.

새벽 온실 작물 상태를 둘러보다 접한 선생님의 비보에 그만 바닥에 덜컥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내 눈앞에 있는 하얀 파프리카 꽃처럼 언제나 환히 웃으시며 "김의자-앙 힘내. 불끈 일어서 끝장내는 싸움을 해야지"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어찌 이리 황망한 이별이 있습니까?

7년 전 선생님이 낙상으로 병원 신세 지고 목발로 간신히 버틸 때가 기억납니다. 그 즈음 세월호 참사가 있었죠. 시국은 엄중했지만 진보세력은 갈라지고 무기력했습니다. 이렇게는 아무런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큰 싸움을 준비했었죠.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아뵌 것도 그 즈음일 겁니다.

환하게 반겨주시며 50년대 후반 당신의 농민운동 기억을 말씀하셨죠. 지금이야 농민운동이 자생력에 기반한 대중운동이 되었지만, 기근과 가난으로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당시만 해도 서울의 젊은이들이 농활을 갔다는 사실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농민운동을 이끌며 지평을 넓혔듯,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이 똘똘 뭉쳐야 함도 그날의 교훈이었습니다.

▲ 2011년 쌍용차 해결 촉구 국민대회에서 발언 중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정택용

우리는 박근혜정권을 끝장내기 위해 민중의 총단결을 도모했고 마침내 2015년 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권력이 넘어진 게 아니라, 안타깝게도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졌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막연한 우리는 기약 없는 농성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쟁했습니다. 양버즘나무 잎도 다 떨어진 대학로에 천막을 치고 매일 미사와 집회를 이어갔습니다. 징한 세월이었고 강고한 의지를 요구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노구에 목발을 짚고 저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시고 부검 정국이 벌어지며 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할 때도 저희 투쟁본부에 가장 가까이 계셨습니다. 어쩌다 저희가 식사라도 대접하려 찾아뵈면 농민들에게 밥 한그릇 공양하는 것을 더 큰 보람으로 여기셨지요. 정초마다 세배를 올리면 쌈짓돈 꺼내 세뱃돈을 주셨고, 먼 길 걸어가는 저희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여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이 저희에게 주신 너름 품을 어찌 다 헤아리고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남은 숙제가 차고 넘칩니다.

선생님! 병상에 누워계시는 동안 우리 사회는 참 무기력해졌습니다. 사회의 모순은 그대로인데 코로라라는 역병으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 또한 오십보 백보인 듯합니다. 그렇다고 내부의 힘이 비축되고 연대와 단결의 기운이 높아진 것도 아닙니다. 다들 입으로 내는 목소리는 크지만, 발품을 팔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동이 필요하고 땀내가 물씬나는 것이 우리의 질서였는데 그러한 모습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들 운동이 늙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본인은 젊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을 키워야하고 그들의 진취적 사고를 배워야한다고 말하지만 본인이 비켜날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열매는 탐하는 이는 많지만, 씨앗을 뿌리고 물주는 이는 드뭅니다. 선생님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늘 선생님 영전에 술 한 잔 올리며 술기운에 취해 꺼억꺼억 울분이라도 토하고 싶지만, 그것은 선생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닌 것을 알기에 이를 꼭 깨뭅니다. 치기 어리게 누군가를 원망했던 과거도, 작은 차이로 이간질했던 일도, 적보다 더한 원수처럼 갈라치고 손가락질했던 사실도, 나와 우리쪽과의 다름을 큰 죄악시하며 손가락질 했던 구도도. 다 내려놓으면 바람에 흩어지는 수증기인 것을 압니다.

오로지 민중만을 바라보고, 민중을 위해 복무하는 것만이 우리의 차이를 극복하는 길임을 압니다. 독재와 권위, 제국과 식민의 사슬을 끊고 자주롭고 자유로운 인간세상의 길이 우리의 길임을 압니다. 분단과 철조망을 넘어 통일의 나라 해방의 나라가 종착임도 잘 압니다. 걸어 온 길, 가야할 길 더 보듬고 더 치열하게 매진하렵니다.

둘둘둘 말아 대동세상의 한 판 굿판을 차려 놓고 떠나시니. 호랑이 같은 포효의 죽비도 내리치시고, 이 놈 어깨, 저 친구 허리를 꿰차 질기게 우리를 손잡게 하시니. 우리가 맞이 할 새봄의 매화향기처럼 제 몫 만큼씩의 올곧은 일꾼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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