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 낯설지만 유용한 해법이 있다

[정욱식 칼럼] 미중 전략 경쟁과 한국의 선택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정지'된 반면에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은 '격화'되면서 한국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 자체도 큰 부담이지만 한반도 문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격화되는 미중 경쟁과 갈등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구조적 제약임은 틀림없다. 한국에게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큰 열쇠를 쥐고 있다. 이런 미국이 중국 견제와 봉쇄를 최우선시하면 한미동맹을 왜곡하고 북한위협을 대화를 통해 풀려는 노력보다는 이를 활용하려는 유혹도 커질 수 있다. 중국 역시 한미동맹이 자신을 겨냥하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북한을 완충지대로 삼고자 하는 전략적 계산이 강해질 수 있다. 그 결과는 한반도 현상 유지의 불안한 고착화이다.

그러나 구조의 문제 못지않게 인식의 문제도 중요하다. 이는 예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적 제약을 우리가 적응하고 순응해야 하는 거대한 힘으로 인식할 경우 대북정책을 포함한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미중 경쟁의 범위'에 갇히게 된다. 이는 한반도 문제를 미중관계의 종속 변수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식은 부지불식간에 한반도의 불안한 현상 유지를 가중시킬 위험이 크다. 이에 따라 미중 전략 경쟁이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없는 '알리바이'로 인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대안적 접근은 미중 경쟁을 한반도 문제의 중대 변수로 간주하면서도 둘 사이의 상호 작용 및 자율성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마련할 수 있다. 미중관계와 한반도 문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는 아니다. 한반도 문제의 악화가 미중간의 협력을 야기할 때도 있었고, 거꾸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진전이 미중관계 악화를 가져온 때도 있었다. 또한 한반도 문제가 미중관계에 완전히 밀착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북한위협론'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의 부상을 견제함으로써 유일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와 북핵 문제 해결 시도 사이에서 오락가락해왔다.

그런데 중국 견제 및 봉쇄는 미국의 전략적이고도 장기적인 목표이면서도 그 결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미중관계 악화가 미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반론이 미국 내에서 만만치 않게 제기되어왔다.

반면에 북핵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악화되었다.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유가 확실해지면, 이는 미국이 반세기만에 경험하는 낯선 현실이다. 미국의 적대국이 이러한 능력을 보유하는 것은 1970년대 중국 이후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가시적인 성과와 이익이 불분명한 중국 봉쇄보다 해결하기만 한다면 가시적인 성과가 명확히 드러날 수 있는 북핵 문제 해결이 미국 행정부의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때가 한반도 문제를 미중 패권경쟁에서 최대한 분리해 문제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이런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북핵 문제가 처음 불거지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과 북핵 문제가 중대한 분수령을 만났던 2008년이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기회들은 미국 강경파의 반발과 한국의 퇴행적인 선택, 그리고 북한의 경직된 태도가 맞물리면서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2018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본격화되었을 때와 그 이후에도 이러한 양상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미중 전략 경쟁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좌초 위기가 맞물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모색해야 할 전략적 선택은 무엇일까? 한반도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낯설지만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한반도 핵문제 해법으로 비핵지대가 제대로 공론화된 적이 없기에 낯설다. 하지만 시야를 세계로 넓혀보면 세계 면적의 절반 가량이 이미 비핵지대이고 여기에 속한 나라들이 116개국에 달한다는 점에서 비핵지대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유용하다. 남북미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로 해놓고 길게는 30년 동안, 짧게는 3년 동안 비핵화의 정의조차에도 합의한 게 없는 현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핵지대는 실사구시의 해법이 될 수 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통용되어온 비핵지대를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로 삼으면 되기 때문이다.

비핵지대가 미중 갈등에 한국이 연루될 위험을 줄이면서 오히려 미중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유력한 방식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가 창설되면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5대 핵보유국들은 남북한을 상대로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고 이들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의 한반도 배치도 국제법적으로 금지된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간의 전략무기 경쟁을 크게 완화할 수 있고 그만큼 한국이 미중 갈등에 연루될 위험도 줄어들게 된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은 남북한이 주도하면서도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미중간의 협력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한반도 문제의 미해결을 미중관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못하다. 북한은 단계적인 방식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고 포괄적인 해법을 들고 대담판을 준비해야 한다. 한국 역시 이러한 접근이 가능해지도록 그 여건과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한다. 낯설지만 유용한 한반도 비핵지대를 공론화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필자의 신간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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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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