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또는 포스트 코로나 대책이라면서 국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재유행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몇 년 안에 제2, 제3의 코로나가 온다고 가정하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나, 정부가 유일하게 내놓은 대안이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격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소식이 없으니.
국회가 법 개정안을 빨리 처리해달라는 요청이 기계음처럼 드러날 뿐,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국민과 시민의 시각에서 좋아지는 것이 있기는 한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흔히 정책의 '대상'이라 부르는, 국민과 시민에게 무엇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다는 또는 의견을 듣는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경에 이른 일차 책임은 행정부에 있다. 전형적인 권위주의 또는 관료주의적 경로. 코로나 대책이라는 여론에 밀려 (전부터 있던) 질병관리청 아이디어를 불쑥 다시 내민 것이 첫 번째요, 보건연구원을 어느 쪽에서 관장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에 화들짝 놀라 질병관리청 소속으로 하자는 것이 둘째다.
어느 직위인지, 정원이 몇인지, 예산과 인사에 관한 권한이 있는지, 이른바 '구조'만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공무원의 관심사만 시끄러웠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코로나19 이후의 감염병 대책과 그 조직의 역량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특히 국민과 시민은 무엇이 좋아지는지, 본질은 사라지고 없다.
미래는 그만두고 현재 문제와 고통이 어떻게 나아지는지 아무 설명이 없는 점이 더욱 의아하다. 감염 확산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일부 지역은 확진자가 많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다고 한다. 방역과 치료를 담당하는 보건의료 인력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핵심 예방법인 개인 수칙 준수와 사회적 거리 두기는 몇 달째 호소, 경고, 촉구, 협조 요청만 되풀이하는 답답한 상황이다.
새로운 조직과 체계에서는 뭣이라도 좀 나아지는가? 해결되는가? 답이 없는 가운데, 그마저 국회에서 논의가 늦어지며 새로운 구조도 갖가지 다른 소리가 다시 나오는 형편이다.(☞ 관련 기사 : <서울신문> 7월 6일 자 '정은경도 갸웃한 '질병관리청 소속 보건연구원'… 최선일까') 국민과 시민이 이의를 제기해서? 천만에, 대부분 논의가 부처와 조직, 정부와 공무원의 자기 논리와 이해관계에서 출발한다.(☞ 관련 기사 : <뉴시스> 7월 9일 자 '복지부, '건강정책실' 아닌 '공공보건정책실' 신설 추진')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부처 간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사항은 국회에서 다룰 것이라는 핑계로, 막상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인 국민과 시민의 의견을 들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따지고 보면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어느 부처 어떤 조직도 비슷했다. 참여와 민주주의의 실상이 이렇게 알량하고 가볍다.
행정부만 아니라 국회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툭하면 서로 여당과 야당을 탓하지만, 형식과 면피에 치우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껏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 대책을 논의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질병관리청 논의는 그만두고라도, 세계가 온통 난리판인 코로나 팬데믹 대응에 국회는 무슨 역할을 했나?
국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몇몇 국회의원이 토론회도 하고 세미나도 열었지만, 그 또한 대동소이, 국민과 시민의 고통을 공론화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몇 보이지 않는다.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이해 당사자의 목소리만 두드러지니 이 또한 참여와 민주주의의 빈곤이라 할 수밖에.
정부와 국회 다음으로 언론에 책임을 묻는다.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정부와 국회를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가 언론이니 당신들의 책임을 함께 따질 수밖에. 코로나19와 그 후 대응에 대해, 그리고 방역조직 논의에 대해, 언론은 어떤 관심을 어느 정도나 기울였나?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손가락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업무량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져서, 언론 '소비자'의 관심사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등. 하지만 이 모든 이유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보이는 한국 언론의 그 이상하고 집요한 관심이야 구조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치자. 현상으로만 해도 코로나19와 그 이후가 그 정도 핑계로 뭉갤 정도로 가벼운 일은 아닐 터. 그저 선정성에 급급한 게 아니라 숨은 고통과 그를 해결할 방도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19와 그 이후가 결코 가벼운 사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단지 일상이 된 마스크 쓰기 정도가 아니라, 경제와 사회와 문화, 그리하여 모두의 지금 삶과 미래, 일상이 코로나를 관통하는 중이다. 한 철학자는 인간의 욕망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참고 : <팬데믹 패닉>(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펴냄) 이런 마당에, 언론은 모든 힘을 다해 지금 '세상만사'가 된 코로나19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와 국회와 언론을 포함해, 지금부터라도 다시 논의해야 한다. 언제까지 국회에서 법을 꼭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잘 이해하기 어렵다. 당장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달라지기에? 현실 정치나 관료주의적 실적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된 논의를 막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차분하게' 논의할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달의 우리 <논평>에서 자세하게 밝혔으니, 다음 대원칙을 참고하기 바란다.(☞ 관련 기사 : '질병관리청' 논의, 첫 단추부터 다시 채우자)
오늘 우리는 특별히 논의 '과정'을 더 크게 문제 삼는다. 정부 조직 개편을 정부가 독점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틀렸다. 행정안전부의 권력은 더더구나 아니다. 일부 관련 전문가가 국민과 시민을 대표한다는 것도 착각이기 십상이다.
여기서 국민과 시민이 누구냐고, 그 대표를 어떻게 알고 고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가 잘못되었다. 그 대표와 대표성은 정치적 과정에서 구성되며 그 결과로서의 권력이다. 국민과 시민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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