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잔뜩 독을 품은 북한을 상대로 특사 파견과 같은 대화 제의도, "책임을 묻겠다"는 강경한 입장도 효과는 없다. 그렇다고 북한의 대남 강경책의 원인을 경제난으로 보고 남북경협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분간 현실성을 가지기 어렵다. 진단 자체가 틀릴 수도 있고 미국 주도의 제재를 완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으며 남북관계 단절을 각오한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도 당분간은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북미관계 중재론도 한계는 뚜렷하다. '형식'적으로 보면 북미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쪽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내용'에 있기 때문이다.
북미정상이 세 차례나 만났고 이 과정에서 북한은 일부 양보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미국은 종전선언,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단과 같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북 제재를 강화해왔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중재의 한계도 분명히 드러났다. 그래서 북한이 내린 결론은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남한은 북미관계에서 빠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제재와 같은 구조적 제약을 당장 뚫을 수 없다면 그 제약과 무관한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 또한 북한의 호응 여부와 관계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리도 북한의 독기를 빼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이들 세 가지를 관통하는 조치들에는 뭐가 있을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부와 여당이 천명한 대북 전단 살포 규제이다. 이는 북한의 대남 강경책의 방아쇠를 제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강 대 강'의 대결 국면을 식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나머지 둘은 필자가 여러 차례 호소한 한미 연합 훈련 중단과 국방비 감축을 통한 "단계적 군축" 의지 표현이다. 이와 관련해 코로나 19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주장해왔다.
분명한 것은 이들 세 가지 조치는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결심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기실 이들 세 가지 조치는 진즉부터 했어야 했다. 연합훈련 중단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두 차례나 약속한 바였다. 대북 전단 살포 중지와 "단계적 군축" 추진도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차례나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의 남북관계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낸 주된 요인인 것만은 틀림없다. 불편하더라도 이 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슬기롭게 냉각기를 거쳐 반전을 준비할 수 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상대방의 언행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공감'에 있다고 말한다. 협상 관계에 있는 상대방과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약속한 바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북한은 한국과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과 "평화의 악수"를 나눌 때와 정상회담이라는 이벤트가 끝난 다음에 보여준 태도가 너무나도 다르다고 간주해왔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십분 활용해왔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도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최고치를 기록했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이 정상회담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고 느낄 때, 공감이 있어야 할 자리엔 증오가 똬리를 틀기 마련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상기한 세 가지 약속부터 지켜야 한다. 이는 북한이 품은 독기를 빼내는데 효과적일 것이다. 특히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 군부를 제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들이다. 늘 그렇듯이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앞날에 대한 예측이 넘쳐나지만, 최고의 예측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북한 역시 트럼프의 '최대의 압박'을 모욕으로 간주해온 것처럼 남한을 향한 막말과 파행적 행동을 멈춰야 한다. 자존심과 존엄은 북한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북한의 최근 행태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분개하고 있는 이유를 북한은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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