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헛다리 짚지 마라

[황재옥의 '한반도 톡'] 경제발전 보장은 북핵해법 아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북미관계는 교착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1월 대선을 앞두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도발만 하지 않는다면, 연말까지 적당한 선에서 북한을 관리하려는 것 같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코로나 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후 남한의 보건의료협력 등의 제안에 무반응이다. 4.27 판문점회담 2주년이 지났지만 남북 정상 간 합의 이행도 답보상태다.

4월 중순 신변 이상설 이후 20일 만에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나타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대북제재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내 갈 길을 간다'는 식으로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민생행보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5월의 '시진핑 친서, 푸틴 축전'을 통해 전통 우방과 연대를 다지면서 국제사회의 제재를 돌파하고, 나아가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과 협력을 끌어내려는 정책을 전개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식료품, 농산물의 대중수입은 대북 제재 이전 3.4억 달러 수준에서 오히려 약 4.6달러 수준으로 증가했으며(2018~2019년), 대중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유는 기존 수입규모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북 제재 강화 이후 북한의 대중 수출은 90% 이상 감소했으나, 대중 수입은 20%의 감소에 그쳤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북한은 제재 장기화로 인한 식량부족 사태에 대비해 식료품 제조업의 국산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의 식량 위기 때와 비교하면, 현재 진행형인 미국 주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한 무역충격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식량과 에너지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1990년대 중반과 같은 경제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제재 장기화로 인한 북한주민의 소득 감소, 생산 활동 위축 등 북한산업 전반의 가동률은 낮아지겠지만 그럭저럭 버텨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대북 제재가 의도한 만큼의 효과를 내고 있는지, 다시 말해 '선 제재 후 비핵화'의 프로세스가 북핵문제 해결의 효율적인 방법인지에 대해 재고해야 할 것 같다. 바꿔 말해 "소용없는 짓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23일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열고 핵전쟁 억제력 강화와 무력기구 편제 개편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2017년 7월 미 본토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1·2차 시험발사 성공의 공로자인 리병철과 포병국장 출신의 박정천이 각각 차수와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는 대북제재의 장기화에도 북한은 절대로 핵·미사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선 비핵화 후 제재완화'를 줄곧 주장해 온 미국의 북핵 해법은 대북제재가 장기화됨에 따라 오히려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대북제재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멈추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극적인 정치적 퍼포먼스를 위해 북핵 카드를 상황적‧단기적으로 쓴 것은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

진정으로 북핵을 해결할 생각이었다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북미수교 문제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어야 했다. 제재를 계속하면서 "북한이 경제발전을 원한다면 핵을 먼저 포기하라"고 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발언(5.24) 같은 것은 북핵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경제발전과 핵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게 체제의 안전 확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물론 북한도 경제발전을 이루어 번듯하게 잘 살고 싶지만, 이는 체제 안전보다는 후순위의 문제다.

미국 정치권이나 싱크탱크 전문가들로서는 이해 안 될 수 있지만, 북한 정치문화의 특성상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도 이겨낸 북한 주민들에게 조금만 참아내자고 하면 제재로 인한 경제난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의 북핵정책 착오로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기 때문에 제재를 받고는 있지만, 이제는 북한에게 핵은 생명줄이 되어 버렸다. 미국 국제정치학에서 정리된 '외교정책론' 관점에서 봐도, 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안보(Security)이고 경제발전(Prosperity)은 그 다음 목표가 아닌가?

그래서 북한은 미국 관리들의 단골 메뉴인 경제발전 보장론에 끄떡도 안하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게 셈법을 바꾸라는 요구를 하는데, 그 핵심은 북한의 안전권 보장(=북미수교)과 북핵 폐기를 동시적으로 교환하자는 것이다. 미국이 지금처럼 동문서답 식으로 경제발전 보장 타령만 해서는 북핵문제를 풀지 못할 것이다. 미국이 '선 제재 후 비핵화'나 '선 비핵화 후 경제발전 보장'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100년 가도 북핵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2년도 채 안 된다. 남북관계를 북핵문제와 연계시킨 미국의 정책은 애당초 잘못된 정책이었고,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만든 한미 워킹그룹이 그동안 남북 교류·협력의 발목을 잡았다면 이 제도도 바꾸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미·북이 밀고 당기는 과정을 되풀이하느라 30년이나 묵은 문제를 다시 남북관계에 연계시키는 것은 우리보고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문재인 정부는 남은 임기 동안만이라도 다시 움직이겠다는 강력한 신호를 북에도 보내고, 미국에도 강력하게 어필해야 할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교류·협력의 적극적인 의지를 재확인시켜야 북한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사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고, 조직 개편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당사자인 우리의 적극적인 "관여와 확산" 의지를 과감하게 행동으로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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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옥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북한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원광대 초빙교수(외교안보통일), 김대중평화센터 이사 등을 거쳐 현재 민주평통 상임위원, 민화협 정책위원장, 통일부 남북관계발전위원회 위원, 더불어민주당 한반도경제통일교류위원회 부위원장,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북한의 기아>(역서, 2001) <북한인권문제 : 원인과 해법>(2012), <국경을 걷다>(2013), <정세현 정청래와 함께 평양 갑시다>(공저, 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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